- a 본문-0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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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또 다시
모든 대중에게 이르시되, (又復告諸大衆=우부고제대중)
- 너희들은 마땅히 여래의 진실히 밝히는 말씀을 믿고 깨닫도록 할지니라.
(汝等當信解如來誠諦之語=여등당신해여래성제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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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천 여년 전, 부다가야 보리수
아래서 정각을 여신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는
중생이 *오욕(五欲)에
집착하고, 온갖
괴로움에 빠져 있기 때문에,
미혹(迷惑) 번뇌를
끊어주는 것에 주력하시다보니
어느 덧 부처님의
성수 72세에 이르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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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처님께서는
42년간 생사(生死), 온갖 변화에 탐착하는 중생의 고뇌를 끊어주고자
*서방정토(西方淨土)의
아미타불이라든가,
환자에겐 소생이 전제된 *동방정토(東方淨土)의 약사여래불을 설하시여 모든 중생의
미혹
번뇌(煩惱)로 연유한 고통을 끊어주셨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중생이 *부처님의
지혜를 얻게 하고자 방편을
쓰셨기 때문에, 42년설에서는 성불의 길을
열지 않으셨습니다. 그것은
중생의 근기가 작은 법을
좋아하고 대승교를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42년
방편설에서는 영불성불(永不成佛),
너희들 중생은 영원히
성불하지 못한다며
성불(成佛)의 도(道)를 설(說)하지 않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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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나 부처님의 성수(聖壽)
72세가 되시자, --이제는 더 이상 미룰 수 없다,
지금이 바로 법화경을 說할
시기가 무르 익었다. *지금이 바로 이때다(今正是其時=금정시기시), 내가 열반(涅槃)할 시기가 가까워졌다.--하시고,
부처님께서는 성불경(成佛經) 법화경을 설하시려고 *왕사성(王舍城) 기사굴산,
영축산에 법화경 한마당을 연출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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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로부터
적문 법화경 *방편품을 필두로
하여, *비유품 *신해품
*약초유품 *수기품 *화성유품
*오백제자 수기품 *수학무학인기품
*법사품 *견보탑품
*제바달다품 *지품 *안락행품을
說하시는 동안 법화경 가르치심이 무르
익어 부처님의 *십대제자(十大弟子)를
비롯하여, 천이백 아라한ㆍ만이천
아라한ㆍ팔만의 보살ㆍ--등 그
수를 헤아릴 수 없는 평신도가
날이 갈수록 법화경 법좌에
집결하여 부처님의 가르치심을 듣고
환희심을 일으켰습니다.
-
- 특히
적문 법화경의 마지막
안락행품 제14에서는 보살들에게 뒤를 이어오는 모든 중생에게
법화경을 說할 때는 네 가지
법(四法)에 편안히 머물러서 법화경을
전하라 하셨습니다. 법화경의 가르치심을
마음속에서부터 믿고 몸으로
실행하면
보살십지(菩薩十地)의 다섯 번 째 극난승지(極難勝地) 경계에 처하더라도 마음의 평온을 유지하는 것은 물론, 진일보(進一步)하여 부처님 문중에 들어간다고 하셨습니다. 몸과 마음이 하나가 되는 심신불이(心身不二) 경계에서 법화경을 *오탁악세(五濁惡世) 중생에게 전하라고 누누히 말씀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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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처님께서는
중생을 위해서 아함경을 필두로
방등경ㆍ반야경까지 42년간
방편교로 일관해
오셨습니다. 특히 반야 6백부에서는
22년간
공가중(空假中), *삼체삼관(三諦三觀)이라는
우주 실상론으로
중생의 *집착을 끊어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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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체삼관은
초철학이요 초과학입니다.
현대과학이 증명한 엄연한
사실입니다. 그러나 삼체삼관만으로는,
태생적으로 인류가 추구하는
영원한 행복이라든가, 영원한 평화의
땅 한세계로 링크 시키지 못하는
것이 중생의 한계입니다.
- 그
점을 부처님께서는 아시고
삼체삼관이라는 진리와 우리들
인간을 하나로 묶어 영원한
<생명>에 눈을 뜨게 하려고
*일품이반(一品二半)이라는
영축산 드라머를 연출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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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품이반, 법화경 종지용출품 제15의
후반이 끝나고, 이어서 *여래수량품 제 16에 들어오시면서 부처님께서는
제일성으로,
<모든 선남자야, 너희들은 마땅히
여래의 진실히 밝히는 말씀을 믿고 깨닫도록 할지니라>는 말씀을 세 번씩 되풀이 하시며
법화회상에
집결한
청중의 몸
- 과 마음을 하나로
집중시키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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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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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살십지(菩薩十地)=보살계위(菩薩階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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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살(菩薩)의
십지(十地)란 보살이 성불하기 위하여
수행하는 위계(位階) 덕목(德目)입니다.
- 제일지(第一地) · 제이지(第二地) · 제삼지(第三地)
----에서 단계적으로 제십지(第十地)에 이르는 것입니다. '지(地)'는 세속에서
말하는 땅(地)에 도착하였다는
말과 같습니다. 대지(大地)는
움직이지 않는 부동체(不動體)입니다.
대지와 같은 온화한 덕(德)이
확실하게 몸에 갖추어져
있다는 뜻입니다. 학문이나
예술에서 일정한 특성과
체계를 갖춘 독자적인
- 범주나
부분을 말할 때, 경지(境地)라고
하는 것과 같은 맥락입니다.
- 불교
신앙에서는 신앙자의 경지에 대해서
많은 단계가 세분되어
있습니다. 그러한 맥락에서
대승(大乘)의
가르치심을 배우고 수행하는
보살에게도 열 가지
단계, 보살십지가 있습니다.
-
- ①
제일지(第一地)
환희지(歡喜地)→이공(二空)의 이치를
확실히 터득하고 대환희(大歡喜)가
일어나는 경지(境地)입니다.
초지성인(初地聖人)이라고도
합니다. 이공(二空)이란
<인공(人空)과 법공(法空)>을
말합니다.
- 인공(人空)이라는
것은, 범부는
몸과 마음에 나타나 있는
나(我)라고 하는 차별상(差別相)에
치우쳐 있는데, 진정한 의미에서
그와 같은 차별적인 나(我)라는
것은 없으며, 모든 인간은 평등한
존재입니다.
- 법공(法空)이라
하는 것은,
일체 만물은 현상상(現象上)으로는
천차만별의 모양을 하고 있으나
그 본질에 있어서는 평등입니다. 이와
같이 두 개의 진리를
깨닫고 마음속에 커다란
기쁨이 솟아오르는 경지(境地)를
환희지(歡喜地)라 합니다
-
- ②
제이지(第二地)
이구지(離垢地)→구(垢), 번뇌(煩惱)의
영향에서
완전히 떠난 경지입니다.
혹자는 *성문(聲聞)의 신분이 되면
번뇌가 완전히 끊어지지 않았느냐.
하물며 보살의 신분으로 새삼스럽게 번뇌
운운 하는 것은 무슨 말이냐--의문을 일으킬 것입니다.
보살이라고 해서 반드시
성문과 연각의 수행을 한
사람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 고대인도의 실정으로는 오히려
성문이나 연각과는 별도로 대승교 법화경에
입문한 사람을 보살이라
하였습니다. 부처님께
귀의하자마자 보살심을 일으켜
보살행을 실천하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
- <이구(離垢)>는 煩惱의 구염(垢染)에서
떠나다 라는 뜻입니다.
--염(染)이란
번뇌에 감염ㆍ오염되였다는
뜻입니다. 煩惱를 제거했다는
정도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진사의
미혹,
번뇌의 티
하나 까지라도 완전히 소멸(消滅)하겠다고
강력하게 실천하는 것이 보살수행이므로 이구지(離垢地)라
합니다.
-
- ③
제삼지(第三地)
발광지(發光地)→
보살수행을
하는 사람의 존재가
주위를
밝게 하는 것을 말합니다, 성문ㆍ연각의
높은 인격(人格)만으로는
밝은 작용이 일어나지
않으며 주위 사람이 긴장하여 냉각(冷却)되는
분위기를 볼 수 있습니다.
- 보살의 인격은
높고 동시에 밝으며, 그리고
온화하여 주위 사람을
편안하게 합니다. 그 경지를 발광지라고
합니다.
-
- ④ 제사지(第四地)
염혜지(焰慧地)→
보살에게 불꽃같은 지혜(智慧)의 힘이 가해지지
않으면 모든 사람을 평등은
물론 공평하게
인도해
갈 수 없습니다. 불꽃같이 맹열한
경지를 염혜지(焰慧地)라고 합니다.
-
- ⑤
제오지(第五地)
극난승지(極難勝地)→ 두드러지게
지극히 어려운 경지입니다.
진속이지(眞俗二智)의 행(行)이
서로 응하거나 어울리는 것,
상응(相應)하여 서로 기맥(氣脈)이
상통(相通)하는 경지입니다.
진(眞)이란, 불도(佛道)를 말함이요, 속(俗)이라는 것은 세속 생활을 말합니다. 불법에 바탕을 둔 지혜와, 세속 사회인으로서 생활의
지혜가 스스로 일치하게 된
경지가 너무도 거룩하다고
하여 극난승지(極難勝地)라
합니다.
-
- 우리들 재가불자(在家佛子)는
사회인으로서 가족과 생활해가면서 불법(佛法)을
배우고 실천해 나가는 것이
어렵습니다. 상업에 종사하거나ㆍ관공서ㆍ회사ㆍ등에
근무하면서 또는 사생활에서의
행동이 佛法에
일치되게 하는 일이 중요합니다.
- 중대한 일을 일으킨다든가ㆍ중대한 의미를 가지는 말을
하기 전에, 과연 이것이 불도(佛道)에
어긋나는 일인지ㆍ어긋나지
않는 일인지를 깊이 생각해서
실행에 옮길 것이며, 아울러
모든 일을 하고 난 뒤에, 과연
부처님의
가르치심과 일치 되는지
어떤지 반성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보살의
길은, 말하는
것이나ㆍ행동하는 것이나ㆍ일체가 부처님의
가르치심과 일치되도록, 주파수(周波數)를 맞추는 것이
어렵다 하여
극난승지(極難勝地)라
합니다.
-
- ⑥
제육지(第六地)
현전지(現前地)→보살이
극난승지 수행으로 혜력(慧力)이 커지면
본질에서 인간은 평등함을 확실히 알 게 됩니다.
교의상(敎義上)으로는,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불성(佛性)을
가지고 있다, 본래 평등하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자신에게
*불성이 있다는 신념을 갖는다는
것은 용이한 일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불성(佛性)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실제로는
--이 사람은
현명한 사람이고 저 사람은
현명치 못한 사람이 아니냐--고
분별합니다.
그러나 보살은 깨달음의 정도가 높아져서 성불 경지에 가까워지면,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는 것을
이치적으로 만이 아니라, 현실적으로
눈앞에 보여집니다. 그것을
현전지(現前地)라고 합니다.
-
- ⑦
제칠지(第七地)
원행지(遠行地)→
대비심(大悲心)을 발(發)하여
성문ㆍ연각 이승의 경지에서 멀리
떠나 버렸다는 뜻입니다.
*성문ㆍ연각 이승(二乘)이,-- 나는
깨달았다--하고 자기와 남을 차별하는
*무기공(無記空)에
빠지는 차별심까지도
깨끗이 없어지고 자타일체(自他一切)가
된 경지를 원행지라
합니다. 남이 고통 받고 있음을
보면 구제의 손길을 폅니다. 그것은 나와 남이라 하는 차별감이
완전히 없어졌을 때, 대비심(大悲心)이
생겨나기 때문입니다.
- 예컨대 감기가
들어 코가 막힌 어린
아이를 그 엄마가 코를 빨아내
준다든가, 아픈 아이에
대변을 찍어 맛을 보아 건강상태를
알아보는데, 더럽다는 것을
전연 생각치 않습니다. 어머니와
아이가 완전일체가 되어 아이를
남이라고 생각지 않기 때문입니다. 타인(他人)에게도
이같은 일체감(一切感)을
갖게 되는 것을 원행지(遠行地)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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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⑧
제팔지(第八地)
부동지(不動地)→무상(無相)
불상(不相)입니다. 상(相)은
차별상(差別相)이라는 뜻입니다.
무상(無相)은,
차별이 있는 상(相)이 일체 없는 모든 것이 평등이라는 것입니다. 즉 차별이 있는
모양(相)이 아니라, 무차별상(無差別相)이라는 뜻입니다.
불상(不相)은,
차별을 만들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무상(無相)이라고
하는 것을 완전히 안
다음에, 자유자재(自由自在)로
중생을 인도하게 된 그 과보(果報)로
부처님의
경계, <큰 하나>에
이르는 자격을 얻습니다.
그 자격은 어떤 일이 있어도
움직이지 않는 경지라 하여
부동지(不動地)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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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⑨ 제구지(第九地)
선혜지(善慧地)→
보살이 선혜지에 들어가면
부처님의 십력(十力)이
작용합니다. 선혜지는
여래십력(如來十力)
, 부처님의 열까지
신통력이 작용하는 보살경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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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⑩ 제십지(第十地)
법운지(法雲地)→법운지는
보살로서의 최고의 경지입니다.
큰 구름이 하늘을 덮고 일체의
생물 위에 공덕(功德)의 큰 비를
내리는 *패연(沛然)과 같이,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을 구제할
수 있게 되었다 해서 법운지(法雲地)라
합니다. 법운지는
부처님
경계의 일보직전(一步直前)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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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래십력(如來十力)==부처님의 열까지
신통력
-
- ① 시처(是處) 비처(非處)를
아시는 지력(智力)→이런 때는 이렇게 하는 것이 적당하며, 이러한 일은 부적당(不適當)하다,
어떤 기준이나 정도 따위에
알맞지 아니하다
라고 하는 그러한 모든 일들을 실수 없이 아는 힘을 말합니다.
- ②
삼세(三世)의
업보(業報)를 아시는 지력(智力)→업(業)이라고 하는 것은 행위(行爲)라고 하는 것입니다.
어떤 행위가
행해지게 되면, 반드시 그 결과가 어떠한 형태로든지 남습니다. 그것을 보(報)라고
합니다. 행위업(行爲業)과 행위의 결과가 뒤에 남는 영향보(影響報)라고 하는 것이,
과거 현재 미래의 삼세에 걸쳐 계속되는 것으로써 그것을 남김없이 꿰뚫어 보시는 힘을
부처님께서는 갖추고 계심을 말합니다.
- ③
제선(諸禪)
해탈(解脫) 삼매(三昧)를 아시는 지력(智力)→
가지가지의 경우에 따라, 그
경우에 움직이지 않는
마음 가짐이라고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 모든 것을 알고 계시는 것이 부처님의 예지(叡智),
지혜의 힘이라는
것입니다.
- ④
제근기(諸根機)의
승열(勝劣)을 아시는 지력(智力)→부처님의 가르치심을 듣는 사람의 근기(根機)의
정도를 정확하게 분별하는 힘을 말합니다.
- ⑤
여러 가지를
풀어서 아시는 지혜(智慧)→
같은 가르치심을 들어도, 듣는 사람들의 성질(性質)이나ㆍ직업(職業)이나ㆍ생활이 각각 틀림에 따라 해석하는데도 미묘(微妙)하게 서로
다르게 합니다. 그 미묘하게 서로 다른 것을 보시고 분별할 수 있는 힘을 말합니다.
- ⑥
모든 가지가지의
경계를 아시는 지력(智力)→사람들의 경계(境界),
곧 사람마다의
신상(身上)을 꿰뚫어
보시는 힘을 말합니다.
- ⑦
일체(一切)
도처(到處)의 도(道)를 아시는 지력(智力)→두루두루
변일체(遍一切)의
업행(業行)은 모두 *인연과보(因緣果報)로
진행되는 것입니다. 허공과
같이 끝이 없어 어느 곳에나
두루 가득한 인연작용을 변취행(遍趣行)이라
합니다. 그러한
변취행으로 끝없이 나아가는
결과를 하나도 빼놓지
않고 다 아는 힘을
말합니다.
- ⑧
천안무애(天眼無碍)로 아시는 지력(智力)→
보통
사람이 알 수 없는 타인(他人)의 마음의 움직임이라던가ㆍ사물의 참 모습같은
것을 틀림없이 아는 힘을 말합니다.
- ⑨
숙명(宿命)과 무루등(無漏等)을 아시는 지력(智力)→숙명(宿命)이라 함은 어떤 사람이 전생에
지은 행(行)에 의하여 어떠한 업(業)을 짓고 이 세상에 태어났다든가 하는 것을
아는 힘입니다. 무루(無漏)라
함은 모든 *견사(見思)의 미혹(迷惑)을 남김 없이 끊어 버린다는 것을 말합니다. 인간은 전생(前生)의 業에 의해 각기 다 틀린 迷惑을 지니고 태어납니다.
어떤 사람은
물욕(物欲)에 깊이 빠져 있고, 또 어떤 사람은 자기분수(自己分數)에도 맞지 않는
명예욕(名譽欲)에 빠져 있습니다. 그러한 숙명의 사람에
의해 분별하고, 그러한 迷惑을
제거하는 지도방법(指導方法)을 모두 아시는 힘을 부처님께서는 구족(具足)하고
계시다는 뜻입니다.
- ⑩
긴(永)
습기(習氣)를 단절(斷切) 하시는 것을 아시는 지력(智力)→습기라고 하는 것은 잠재의식의
일종으로써 누구나 기억(생각)하고 있는 심리입니다. 어떤 나쁜 버릇들,
예를 들면, 화를 잘 낸다든가ㆍ작은 일에도 필요 이상으로
심하게 남을 책망한다든가ㆍ남의 행복을 보면 질투하는 마음을 일으킨다든가ㆍ또는 수양에 의해 모든 나쁜 버릇이 다 사라진 것 같이
마음의 표면으로는 생각하고 있어도, 간혹 어떤 기회에 맞부딪히게 되었을 때, 평소
자기 마음속에 아직도 그 못된 버릇이 일어나려고 하는 기분이 남아 있는
것을 느끼는 때가 있습니다. 걷잡을 수 없이 솟구치는 마음이 솟아 오르려는 것 같은
것을 느끼고, <아아 ! 아직도 못된 습기가 남아 있구나> 하고 자신의
악습(惡習)을 생각해 보게 되는데, 그러한 마음속 깊숙히 남아 있는 그 미묘한 것이 있을까
없을까 하는 그러한 기분을 습기라 합니다. 그 좋지 못한 습기도 영구(永久)히
일어나지 못하도록, 단절(斷切)하는 방법을 아는 힘을 부처님께서는 갖추고
계십니다. 이상이 부처님의 십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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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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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 ! 법화경
안락행품(安樂行品) 제
14
-
- *법화경
안락행품제 14에,--그
때
문수사리법왕자 보살마하살이
부처님께 말씀하되,
- 세존이시여,
이 모든 보살은 심히
있기 어렵나이다. 부처님께
공경하고 순종하는 고로
크게 서원을 일으키어
후의 악한 세상에서 이
법화경을 받들어 가져ㆍ읽고ㆍ외우고ㆍ설하오리다.
- 세존이시여,
보살마하살이 후의 악한
세상에서 어떻게 하여
능히 이 경을 설하겠나이까.
- 부처님께서
문수사리에게 이르시되,
만일 보살마하살이 후의
악한 세상에서 이 경을
설하고자 하면 마땅히
네 가지 법에 편안히
머물러야 하나니, 첫째는
보살이 행(行)할 바와 친근(親近)할
바에 편안히 머물러서
능히 중생을 위하여 이
경을 설할지니라.
- 문수사리야,
무엇을 보살마하살의
행할 바라 하느뇨. 만일
보살마하살이 인욕지(忍辱地)에
머물러 부드러이 화하고
선(善)에 순종해서 거칠지
아니하고 마음에 놀라지
말 것이며, 또다시
법에 행하는 바가 없이하여,
모든 법을 실상과 같이
관(觀)하고, 또한 행하지도
말며 분별하지도 말 것이니
이것을 보살마하살의
행할 바라 하느니라.
- 무엇을
이름하여 보살마하살의
친근할 바라 하느뇨.
보살마하살은 국왕ㆍ왕자ㆍ
대신ㆍ관장을 친근하지
말며, 모든 외도의 범지ㆍ이건자ㆍ등과 세속의 문필과
찬영(讚詠)의 외서(外書)를 짓는 이와ㆍ및 노가야타(路伽耶陀)와ㆍ역노가야타(逆路伽耶陀)를
친근하지 말 것이며,
또한 모든 흉희(凶戱)의
서로 때리고 서로 치는
것과ㆍ힘을 겨루는
것과ㆍ가지가지로 변화하는
장난을 친근하지 말며,
또 전다라와ㆍ돼지와ㆍ양과ㆍ닭ㆍ개를 먹이는 이와ㆍ사냥하고
물고기를 잡는
나쁜 율의(律儀)에 친근하지
말지니라. 이와
같은 사람들이 혹시
오거든 곧 위하여 법을
설하되 무엇을 바라지
말며, 또 성문을 구하는
비구ㆍ비구니ㆍ우바새ㆍ우바이를
친근하지 말며, 또는
문안하지도 말며, 혹은
방이거나ㆍ혹은 경행(經行)하는
곳이거나ㆍ혹은 강당에
있어서도 같이 머무르지
말며, 혹시
오거든 근기를 따라 법을
설하되 무엇을 바라지
말라. 문수사리야,
보살마하살은 또 여인에게
욕망의 생각을 내는 모습으로
법을 설하지 말지며ㆍ또한 보기를 즐겨하지
말며ㆍ혹은 타인의 집에
들어갈지라도 젊은 여자나
처녀나 과녀와 같이 말하지
말며ㆍ또는 다섯 가지의
완전치 않은 사람과 가까이
하여 깊이 친하지 말며ㆍ홀로 남의 집에 들어가지
말지니, 만일 인연이
있어 홀로 들어갈 때에는
다만 일심으로 부처님을
생각하라. 만일
여인을 위하여 법을 설하려거든
이를 드러내어 웃지 말고,
가슴을 헤쳐 놓지 말라.
오로지 법을 위해서라도
깊이 친하지 말아야 하겠거늘
하물며 다른 일일까보냐.
즐겨 연소한 제자와ㆍ사미와ㆍ어린아이를 기르지 말며,
또는 함께 한 스승 섬기기를
즐겨하지 말 것이며,
항상 좌선을 좋아하되
한적한 곳에 있어 마음을
닦을지니라. 문수사리야
이것을 첫째의 친근처(親近處)라고
이름하느니라.---고
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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