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다른 나라 중생이 공경하고 믿고 즐거워하는 자가 있으면, 나는 다시 그들 가운데서 위없는 법을 설하건만, 너희들은 이를 듣지 못하므로 다만 내가 멸도했다 생각하느니라. -----*법화경 여래수량품 제 16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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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화경(法華經) 서품(序品)-1-01-01-
 
사람이 산다는 것은 은혜(恩惠)입니다. 대우주 본체이신 *구원실성 석가세존의 은혜입니다.보편적으로 부처님의 은혜에 보답한다든가 또는 조상이나 부모에 대해 감사의 뜻을 나타내고자 하는 것을 *공양(供養)이라고 합니다. 흔히 공양(供養)이라고 하면 꽃이나 음식을 바칩니다. 크게는 삼층 또는 오층의 탑을 세우기도 합니다. 그러나 供養이라는 것이 그러한 형체로 나타내는 것만으로 충분하냐 하면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供養이란 결국 감사의 뜻을 나타내는 마음입니다.
십지론(十地論)에서, 형체(形體)를 갖춘 물건을 바치는 것만으로는 미흡하다면서 *공양 <이공양(利供養)ㆍ경공양(敬供養)행공양(行供養)>으로 크게 나누어 표현하였습니다.
 
이공양(利供養)→이(利)는 물건을 뜻합니다. 예컨대 꽃이나 음식을 바치는 것입니다. 크게는 탑(塔)을 세우는 것과 같이 형체가 있는 물건을 공양하는 것을 이공양이라 합니다.
경공양(敬供養)→ 부처님이나 조상에 대해 생전의 덕(德)을 칭송하는 것입니다.  감사하다고 생각하는 마음을 자기의 말이나 행동으로 나타내는 것을 경공양이라 합니다.
행공양(行供養)→ 부처님의 가르치심을 자기의 몸으로서 실행한다거나ㆍ또는 부모님이나 조상의 덕에 보답하는 일을 한다거나ㆍ아무튼  자기가 행동, 몸으로써 供養하는 것입니다.
 
지금부터 *법화삼부경, 무량의경ㆍ법화경ㆍ관보현보살행법경ㆍ가운데 본론(本論)에 속하는 법화경 서품을 열겠습니다.
서품 제1은 부처님께서 법화경을 설하시는 주변환경입니다. 부처님께서 42년 *방편설을 마치고 *일체중생구제론이 대전제된 진실설 법화경을 설하시고자 *<때ㆍ곳ㆍ지위>를 완벽하게 연출하시는 *일불승 법화회상의 현장 설명이 되겠습니다.
 
*법화경 서품(序品) 제 1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직접 설하신 법문이 아닙니다. 부처님께서 법화경(法華經)을 설하시기 전, 영축산 주변환경과ㆍ영축산 청중과ㆍ분위기가 21세기 IT 정보화시대를 능가하는 상호작용하는 멀티미디어 장엄불사입니다.
영축산 청중은 석가여래*백호광명으로 부처님의 모든 세계를 보고 무슨 법문을 설하시려고 이토록 불가사의(不可思議)한 장엄불사를 하시는가 하고 의문을 가졌습니다. 그 때 *문수보살이 과거에도 이러한 일이 있었는데 아마 法華經설(說)하시려는 것이 아니냐고 *미륵보살에게 귀띔 합니다. 그 때 영산회상 청중은 부처님께서 몸소 깨달으신 바를 그대로 설하려고 하시는구나 하는 기대를 가지면서 부처님을 우러러보고 부처님의 설법을 경청하고자 마음을 열었습니다.
 
*법화경 서품(序品) 제1 첫머리에,--- 이와 같이 나는 들었노라(如是我聞=여시아문).---
 
다문제일의 아난존자는,--<여시아문>이라--法華經 설법의 시작을 예고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나는 들었노라>는 말에는 두 가지 뜻이 있습니다. 하나분명히 그렇다는 뜻입니다. 졸면서ㆍ한 눈을 팔면서 들은 것이 아니라, 열심히 들었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들은 바에 의하면 바로 이러하다 하는 뜻으로 <나는 들었노라>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부처님이 아닌 보통의 사람이 부처님의 가르치심을 들은 것이니까, 만약 틀리는 점이 있다면, 그것은 자신의 책임이라는 것을 밝히는 책임의식이 숨어 있습니다. *아난존자는 자기의 기억력의 자신감을 나타내면서도, 한편으로는 몹시 겸손한 태도라 하겠습니다.
 
---한 때 부처님께서 *왕사성(王舍城) 기사굴산 중에서 큰 비구(比丘) 대중(大衆) 일만이천인(一萬二千人)과 함께 계셨으니 이는 다 *아라한(阿羅漢)이라,----
 
한 때, *부처님, 석가여래께서는 왕사성 기사굴산 중에 계셨습니다. 그 때 수없이 많은 비구 대중이 사방에서 빠짐없이 모두 모여왔습니다. 그들 비구는 모두 아라한이었습니다.
 
<부처님(佛)>이란, 인도어(語)로 타(佛陀)입니다. 한문으로는 깨달은 사람,<각자(覺者)>입니다. 깨달았다는 것은 단지 책을 읽어서 사물의 지식을 알았다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깨달았다는 것의 진정한 의미는, 본래부터 타고난 존귀한 성질을 남김없이 발전시켜서 *절대의 진리를 확고하게 붙잡은 어른이 불타, 부처님이라는 존재를 알 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부처님>이라는 명사는 석가여래 한 분 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경전상에서 *삼신불 또는, *아미타불을 비롯한 모든 부처님은 다 깨달은 부처님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 위에서 인간의 몸으로 태어나서 부처님이 되신 분은, 오직  circle03_darkgreen.gif 석가모니 불(佛)  한 분 뿐입니다. 이 땅에 우리와 같이 태어나서 우리와 같은 음식을 먹고 자라서 *출가(出家)수행하여 부처님이 되신 분은 석가모니 (佛) 한 분 밖에 없으므로,우리는 부처님의 가르치심을 배우는데 있어서 석가모니불(佛)에 의지하여 배우지 않거나 석가모니불뛰어 넘어서 배울 수는 없습니다.
석가여래의 가르치심 가운데는 석가여래 이외의 다른 부처님의 내력도 설해 있습니다마는 그것은 우리와 같이 이 땅 위에 태어나신 부처님이 아닙니다. 우리는 석가여래를 통해서 배우지 않으면, 신앙상에 등장하는 모든 부처님을 알 수가 없습니다. *아미타불(阿彌陀佛)도ㆍ*약사여래(藥師如來)도ㆍ대일여래도ㆍ모두 석가여래의 입으로부터 탄생된 분신불(分身佛) 입니다.
그러므로, <부처님(佛)>이라고 하면 곧 석가여래입니다. 왜냐하면, *사바세계에 나타나신 부처님은 석가여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다른 부처님을 가리킬 때는 반드시 명호(名號)를 붙여서 무슨 부처님이라고 합니다.
예컨대, <쌀>에는 좁쌀ㆍ찹쌀ㆍ보리쌀ㆍ기장쌀ㆍ등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마는 그저 <>이라고 하면 그것은 으례히 멥쌀을 말합니다. 멥쌀 이외의 것을 가리킬 때는 <쌀>자 앞에 보리기장의 이름을 붙이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왕사성(王舍城)> 고대인도 마갈타국(國)의 서울입니다. 석가여래께서 왕사성 옆에 있는 <기사굴산>이라는 산 속에 계셨습니다. <기사굴>이란 범어(梵語)입니다. 중국어(語)로는 취두(鷲頭)입니다. 산 모양이 독수리의 머리와 흡사하다는 뜻입니다. 기사굴산 석가여래께서 여러 번 찾아가 가르치심을 설하셨습니다. 특히 부처님의 성수 72세에서 80세에 *열반에 드시기 까지 8년간 법화경을 설하신 성지(聖地)입니다. 후일 이곳은 신성한 곳이라 하여 (靈)자를 올려서 영취두산(靈鷲頭山)이라 한 것을 생략해서 <영축산>이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영축산 교(敎)를 설하시는데 아주 알맞은 장소인지라, 많은 사람들이 모여 가르치심을 들었습니다.
불교에서는 부처님께서 교(敎)를 설하시는 장소를 이른 바 *<정사(精舍)>라고 합니다. *기원정사(祇園精舍)니ㆍ죽림정사(竹林精舍)니 하는 것이 다 를 설하신 장소입니다.
<정사(精舍)> (精)은 잡 된 것이 섞이지 아니한 마음으로 수행한다는 뜻입니다. *교(敎)를 설하는 사람도 일체의 인간을 구원코자 하는 마음 뿐 다른 생각이 없고, 듣는 사람도 진정한 *도(道)를 배우고자 하는 마음으로 수행할 뿐이므로 *정사(精舍)라 합니다, 지금의 (寺院)입니다. <(寺)><(院)>은, 원래 관청(官廳)이라는 뜻입니다. 오늘날도 <(院)>자는 대법원이니감사원(監査院)이니 하여 관청의 뜻으로 쓰이고 있습니다.
 
1세기 경, 중국 후한(後漢), 불교가 처음으로 인도에서 중국에 건너갔을 때, (寺)이라는 것이 없었으므로, 관청에다 불상(佛像)을 모시고, 승려가 관청에 머물러 있으면서 설법을 했습니다.관청이라는 글자, <(寺)><(院)>은, 설법하는 곳  또는 부처님을 모시는 이라는 뜻으로 되었습니다.
 
<큰 비구 대중>이란, 행실도 훌륭하고 덕(德)도 뛰어난 사람을 큰 비구(大比丘)라 합니다. <(大)>이란 칭찬의 뜻입니다. *사부대중부처님의 직접 제자입니다. 비구비구니우바새우바이입니다. 비구 *출가한 남자. 비구니는 출가한 여자입니다. 출가는 처자 권속을 갖지 않고 자기 한 몸을 뜻합니다. 우바새 재가(在家)의 남자. 우바이 재가(在家)의 여자입니다. 가정이 있는 보통의 생활을 하는 사람입니다. 한문(漢文)으로 비구 걸사(乞士)비구니걸녀(乞女)라 합니다. 우바새청신사(淸信士)우바이청신녀(淸信女)라 합니다.
걸사(乞士)걸녀(乞女)<(乞)> <빌어 얻는다>는 말입니다. 무엇을 빌어 얻는가 하면, <부처님께 빌고, 음식사람에게 빈다>는 것입니다. <빈다>는 뜻은, 그냥 얻는 것이 아니라, 감사하며 얻는 것입니다. 뽑내면서 얻는 것이 아니라, 부처님으로부터 가르치심을 받는 것이니까 공손히 가르치심을 비는입니다. 남에게 <>비는 것도 공손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食)>이란, 먹는 것만이 아니고 모든 생활의 자료(資料) 일체를 말합니다.
 
인간의 삶이란, 농사 짓지 않고 남이 농사 지은 쌀을 먹으며ㆍ길쌈하지 않고 남이 길쌈한 것을 입으며ㆍ집을 짓지 않고 남이 지은 집에서 사는 것이므로, 모든 사람의 행위, *업에 대해ㆍ모든 사람의 은혜에 대해 항상 감사하는 것입니다. 모든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에게 감사하는 것입니다. 자기 한 사람이 세상의 부(富)를 조금도 증가시키지 못하고 남의 노력의 결과를 가지고 먹고ㆍ입고ㆍ수행하는 것이니까, 한 알의 쌀ㆍ한 치의 베라도ㆍ깊이 감사하는 마음으로 얻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불교에서 말하는 <빈다>의 진정한 뜻입니다.
<청신(淸信)>은, 깨끗한 믿음의 신앙이라는 뜻입니다. 불법인간이 인간으로서의 삶의 길을 가르쳐 주는 것이기 때문에, 를 배워야만 비로소 인간다운 인간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맙다감사하다는 생각으로 믿는 것이 깨끗한 믿음, 청신(淸信)입니다. 어떤 이해득실(利害得失)를 목적하고 믿는다면, 그것은 청신이 아닙니다. 내가 부처님을 믿음으로 해서,--마음이 깨끗해진다ㆍ마음이 소생(蘇生)한다ㆍ마음이 바로 세워진다---이러한 생각으로 믿는 것이 청신입니다.
<일만이천인(一萬二千人)과 함께 계셨으니>→경전에 나오는 *숫자(數字)에 구태여 집착할 필요는 없습니다. 몇 만명이라고 씌어 있다고 해서 정말 몇 만명이 있었다고 꼭 그렇게 생각할 것은 없습니다. 고대인도에서는 수(數)를 말할 때에는 *구족(具足), 모든 것이 갖추어졌다는 뜻으로 제일 먼저 <(四)>이라는 수를 썼습니다. <(四)>은 <오른쪽왼쪽>이 모두 갖추어졌다는 뜻이며 지금도 사방(四方)이라는 말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덟(八)>이라는 숫자도 같은 뜻으로 쓰입니다. 전후좌우(前後左右) 사방(四方)에 다시 네 귀퉁이(四維)를 합하면 팔방(八方)이 됩니다. 이와 같이, 갖추어져 있고 빠진 것이 없다는 뜻으로, 넷(四) 또는 여덟(八)이라는 숫자를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거기에 중앙(中央)을 하나 더 넣어서 아홉(九)을 쓰는 일도 있습니다. <아홉(九)>이라는 숫자는 물건이 가득찬다는 뜻 입니다.
이와 같이 경전에 나오는 숫자를 지금의 수사(數詞)의 개념으로 엄밀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니ㆍ여덟이니ㆍ아홉이니 하는 숫자는 조금도 빠짐이 없이 다 모였다는 뜻으로 쓰이는 것이므로, 그 곱수(倍數)를 써도 좋습니다. 모두 갖추어져 있다는 뜻입니다. 예컨대, 부처님의 키를 *장륙(丈六)이라고 합니다. 장륙16을 뜻합니다. 8의 배수(倍數)입니다.
부처님이란 모든 덕(德)이 원만(圓滿)하게 갖추어져 있어서, 대중이 우러러 사모하는 분이라는 뜻으로 8의 배수인 장륙으로 부처님의 키를 나타내었습니다. 실제로 석가여래의 키를 잰 사람은 없었을 것입니다. 다만 덕(德)완전하게 갖추어진 분이라는 뜻으로 부처님을 <장륙신>이라 하였습니다. 중국한국일본에서 부처님의 상(像)을 그림으로 그리거나 나무로 조각할 경우에, 8의 배수로 하는 것정례(定例)로 되어 있습니다. 여덟 치(寸)ㆍ여덟 자(尺)도 괜찮으며, 또는 <한 치 육 푼>도 무방합니다. 아무튼 8 의 배수(倍數)로 하여 장륙불상(丈六佛像)을 조성하고 있습니다. 경전에서 수사(數詞)를 말할 때에는 구족(具足), 모두 갖추어져 있다는 뜻으로 쓰입니다. 앞으로 자주 수사(數詞)가 나옵니다마는 그 수효에 구애 될 필요는 없습니다.
<아라한(阿羅漢)>이란, 범어이며 한문으로 <살적(殺賊)>이라고 번역합니다. <(賊)>이란 미혹(迷惑)입니다. 迷惑을 깨끗이 없앤(殺) 사람을 <아라한>, <나한>이라고도 합니다.  돈을 원한다ㆍ옷을 원한다ㆍ밉다ㆍ싫다 하는 세속의 迷惑을 깨끗이 없앤 사람이 <아라한>입니다. 그러나 迷惑을 없이 하는 것만으로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불교에서 迷惑을 없앤다는 것은, 세상을 위해ㆍ인간을 위해ㆍ노력하거나 수업(修業)을 쌓아 *즉신성불하는 것을 전제한 준비 단계(準備段階)입니다.곧 <아라한>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오랜 동안 수업(修業)을 쌓아 속세에 대한 미혹이 없어진 모든 아라한 제자들이 40 여년 동안 *방편의 교(敎)를 받아서, 이제는 덕행이 상당히 높아졌으므로, 이제 그들에게 좀 더 깊은 *진실의 교(敎)를 설하시겠다는 것이 法華經설하신 목적의 하나라는 뜻이 되겠습니다.
 
---이미 모든 *누(漏)가 다하여 다시 *번뇌(煩惱)가 없으며 깊은 진리(眞理)를 얻어, 모든 미혹(迷惑)된 습성(習性)을 없이하고(盡諸有結=진제유결), 마음의 자재(自在)를 얻었음이라.----
 
---왕사성 기사굴 산중에 모인 수없이 많은 제자들은 육신으로부터 일어나는 모든 욕망을 끊고 오로지 부처님의 가르치심에 의지하여 사는 청정한 큰 비구들입니다. 그 제자들은 모두 미혹 번뇌를 끊고 마음의 자재를 얻어 어떠한 가르치심도 들을 준비가 다 된 사람들입니다.--
 
<누(漏)>란, 중생 관점(觀點)에서 욕망(欲望)입니다. - 누군가가 보고 싶다ㆍ맛있는 것을 먹고 싶다ㆍ고운 옷을 입고 싶다ㆍ하는 따위의 욕망입니다. (漏)란, 몸에서 자연히 나오는 육신의 욕구입니다. 중생은 욕망에 의지하여 살아가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보고자 하고ㆍ맛있는 것을 먹고자  하는ㆍ욕망에 의지해 살아가고 있습니다.
중생의 욕망이란 부처님 분상에서 보면 迷惑입니다. 인간이 迷惑하기 때문에 백팔번뇌(百八煩惱)가 있습니다. 백팔번뇌가 일어나는 근본은 * <(貪)ㆍ(瞋)ㆍ(癡)>삼독(三毒)입니다. 이 <> 삼독이 여러 가지로 얽히고 설켜서 가지가지 관계를 이루기 때문에, 번뇌백(百)도 되고ㆍ이백(二百)도 됩니다. <탐한다(貪)>는 것은 무엇이든지 자기에게 좋도록만 하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성낸다(瞋)>는 것은 자기와 조금만 의사(意思)가 맞지 않아도 상대를 불쾌하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미련하다(癡)>는 것은 눈앞의 일만 생각하고 조금도 앞 뒤를 헤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 근본되는 세 가지로 인해서 미워하고질투하고적(敵)이 되어 다툽니다. <> 삼독백팔번뇌가 일어나는 근본입니다.
<다시 번뇌가 없다>란, 부처님의 가르치심을 들은 공덕으로 迷惑이 없어졌다는 것입니다. 인간을 구원한다는 것이 부처님의 근본되는 자비사상입니다. 부처님의 제자는 다 부처님의 생각처럼, 세상을 위해인간을 위해힘을 다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가 迷惑해 있어서는 남을 이타(利他), *홍익할 수 없습니다. 자기가 곤경에 빠져 가지고는 남을 구원해 줄 수 없으므로, 우선 자기 마음의 *견사의 미혹을 없애고 마음의 어두움을 밝게 하는 것이 <자리(自利)>입니다.
이타(利他) 남을 가르쳐서, 그의 마음의 迷惑이나 번뇌(煩惱)를 없애주는 것입니다. 자각(自覺)각타(覺他)입니다.
*자각(自覺)이란, 자기가 깨달아서 마음의 迷惑없어지는 것입니다.
각타(覺他)란, 남을 가르쳐서 모든 사람에게 깨달음을 열어 주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자타(自他), <자기>이라고 하는 양쪽 면에 다 노력하라고 하셨습니다. 자기가 미혹하여 마음이 어두워 가지고는 입으로 어떤 말을 해도 남을 움직일 수 없습니다. 남을 가르치는 근본으로서 우선 자기 자신부터 *참회하고 정화(淨化)하는 것입니다.
<모든 미혹된 습성을 없이하다(盡諸有結=진제유결)>에서, <(有)>는 인간의 차이를 말합니다. <(結)>은 집착하는 것입니다. <진제유결(盡諸有結)>이라는 것은 인생의 가지가지 차별에 집착하는 마음을 없앤다는 뜻입니다. 사람에게는 여러 가지 다른 점이 있습니다. 재산이 많은 사람도 있고 없는 사람도 있으며ㆍ신분이 높은 사람도 있고 낮은 사람도 있으며ㆍ얼굴이 잘생긴 사람도 있고 못생긴 사람도 있습니다. 이렇듯 모두가 다 다릅니다. 그 다른 것은 나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 다른 점에 집착하는 것이 나쁘다는 것입니다. 집착하기 때문에 잘못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재산이 있는 것은 나쁘지 않지만, 그 재산에 * 집착해서 자기 재산을 자랑하고 뽑내니까 없는 사람에게 위화감(違和感)을 주고 탐욕을 일으키게 하기 때문에 나쁘다는 것입니다. 반대 재산이 없다는 것에 집착하여 있는 사람을 증오하고 해코자 하는 것이 나쁘다는 것입니다. 재산있는 사람은 있다고 뽑내고ㆍ없는 사람은 없다고 비뚤어지고ㆍ잘생긴 사람은 잘생김을 자랑하고ㆍ 못생긴 사람은 잘생긴 사람을 투기하는 등 세상의 모든 집착을 없앤다는 것진제유결(盡諸有結)입니다.
<마음의 자재(自在)를 얻었다>에서 <자재>란, 어떠한 경우에도 그 환경의 제제(制裁)를 받지 않는 것입니다. 환경은 주위에서 옵니다. 오늘날과 같이 복잡한 세상에서는, 자기의 생각대로만 되지 않습니다. 또 주위의 사정은 자꾸만 변합니다. 그 환경이 달라질 때마다, 이랬다 저랬다 하다가는 인간의 일생이란 어떻게 해야 좋을런지 모르게 됩니다. 그래서 어떠한 환경에도 그 환경에 편안할 수 있는 마음이 <자재>입니다. 재산이 있으면 그 돈으로 세상을 구하고ㆍ없으면 없는대로 가난을 참아가면서 세상을 위해 노력하고ㆍ남이 존경해 주면 존경해 주어서 고맙다고 생각하고ㆍ남들이 자기를 돌아보지 않더라도 자기는 자기 할 일을 한다고 생각하면 그만입니다. 어떠한 환경에도 제재(制裁) 당하지 않고, 집착하지 않는 것 <마음의 자재를 얻음(心得自在)>입니다. 자재를 얻은 후, 다시 *선근 수업(修業)을 쌓으면, 인류 구원, *홍익인간(弘益人間) 이화세계(理化世界)를 건설하는 위대한 *지도자가 될수 있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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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ffeecup_skyblue.gif            circle03_darkgreen.gif 석가모니 불(釋迦牟尼佛)
 
<석가모니불(佛)>에서, (佛), <부처님><깨달은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천태대사께서는 범어(梵語)인 *<석가모니>를 한문(漢文)으로 나누어 따로 주석하셨습니다.
<석가(釋迦)>란 <능인(能仁)>을 뜻하고, <모니(牟尼)>란 <적묵(寂默)>을 뜻합니다.
능인(能仁)에서 <(能)>이란, 일체의 인간을 구원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는 뜻입니다. 모든 인간을 구원하는 힘, 작용을 <(仁)>으로 나타내어 <능인(能仁)>이라고 하셨습니다.  
적묵(寂默)이란 어떠한 경우에도 조금도 주위로부터의 영향을 받지 아니하고 동요되지 아니한다는 뜻입니다. *절대의 진리를 깨달아서ㆍ어떠한 경우에도ㆍ어떠한 에도ㆍ어떠한 환경에도ㆍ조금도 동(動)하지 아니하고 조금도 주위로부터 영향을 받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寂)>이란 움직이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默)>이란 고요한 것입니다. 일체의 인간을 구원할 수 있는 힘인 <능인>과, 부처님의 절대의 진리를 깨달은 경지인 <적묵>-이 두 가지를 합쳐서 *<능인적묵(能仁寂默)>, <석가모니>라 합니다.  인간은 미혹하므로, 주위 환경에 흔들립니다. 진실로 깨달았을 때는, 흔들리지 않습니다. 사람은 알고 있으면 놀라지 않지만 모르니까 놀라고 당하는 것입니다.
 
1950 년 6월 25일 이른 새벽, 북한의 남침으로 일어난 6. 25 전쟁도, 미리 알고 있었으면 그렇게 놀라지도ㆍ당황하지도 않았을 것이지만 모르고 있었기 때문에, 모두가 놀라고 3년간 한반도는 전쟁터가 되었습니다. 인간이 적묵(寂默), 진정한 깨달음을 얻으면, 어떤 변화가 있더라도ㆍ어떠한 압력을 가해도ㆍ평소에 쌓은 수업(修業)으로 까딱도 하지 않을 것입니다.
천태대사께서는 <적묵(寂默)으로 해서 생사(生死)에 머무르지 아니하고, 능인(能仁)으로 해서 열반(涅槃)에 머무르지 아니한다>고 하셨습니다. <적묵>, 진실로 절대의 진리를 깨달은 몸으로써 *열반 속에 가만히 있지를 않고, <능인>, 세상의 미혹한 인간 가운데 들어가 그들과 함께 있으면서, 그들을 구원하는 인간불사에 애쓴다는 것입니다.  circle03_darkgreen.gif 화광동진의 보살행으로 모든 사람을 구원하겠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석가모니불(佛)본래의 성질, 진정한 홍익사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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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dea.gif   잠깐 !       circle03_darkgreen.gif 화광동진(和光同塵)
 
*구원실성 석가여래께서는 절대의 깨달음을 여셨다고 해서, 결코 미혹해 있고 괴로워하고 있는 우리들 *무명 중생을 멀리하지 않으십니다. 우리들과 같이 미혹한 범부 가운데 함께 하시면서 우리를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해 주십니다. 여기에 진정한 부처님의 은혜와 고마움이 있습니다.
불교가 중국에 들어갔을 때, 당시 중국인들이 추구하던 노자(老子) 사상(思想)불교의 *대승 (大乘) 사상이 맥락을 같이 하였습니다. 그래서 중국인들은 부처님을 설명하여, *화광동진(和光同塵), <빛을 부드럽게 하여 티끌과 함께 한다>고 하며 불교를 쾌히 받아드렸습니다.
<화광동진>이라는 성어는 원래 노자도덕경(老子道德經)에 나오는 성어(聖語)로써 인간중심주의를 말씀하시는 부처님의 *대자대비심과 일맥상통하므로 중국에서 대승불교가 발전하였습니다.
화광동진이란 태양을 말한 것입니다. 태양이라는 것은 하늘에 높이 떠 있어서, 지극히 밝은 빛을 내고 있지만, 그 태양이 지구촌을 비출 때에는 더러운 물건도 모두  비춥니다. 태양 그 자체는 지극히 깨끗하지만, 그 빛은 아무리 더러운 물건이라도 이것을 멀리 하지 않습니다.
<빛을 부드럽게 하여 티끌과 함께 한다> 같이, 진실로 깨달은 사람은 자기가 깨달았다고 해서 세상을 멀리하지 않습니다. 미혹한 인간과 함께 어울려서 그들에게 구원을 주자는 마음을 일으킵니다. 그것이 부처님의 자비입니다. 法華經을 배우는 우리들은 좀처럼 따르기 여려운 일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역시 그러한 마음을 가지는 것입니다. 흔히, 신앙을 갖고 있는 사람은 자칫하면 우월감을 가지고, <저 사람신앙이 없으니까 상대가 되지 않는다>하는 사람도 있습니다마는, 갓난아이는 다 신앙이 없습니다. 신앙을 가지고 태어나지 않습니다. 신앙이 없다고 상대하지 않는다면, 갓난아이는 기르지 않고 모두 버려야 할 것입니다. 처음에는 누구나 부처님이라는 존재를 모르니까 알도록 해 주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깨달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법화행자는 부처님의 자비심을 본받고자 홍익 사랑에 앞장 서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