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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어찌하여 그러한고, 여래는 진실과 같이 삼계의 상(相)을 알고 보아 생사(生死)에 혹은 물러가고 나옴이 없고, 또는 세상에 있는 자(者)도 멸도(滅度)하는 자도 없으니, (實)도 아니고, (虛)도 아니며, 같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느니라. (所以者何=소이자하 如來如實知見=여래여실지견 三界之相=삼계지상 無有生死=무유 若退若出=약퇴약출 亦無在世=역무재세 及滅度者=급멸도자 非實非虛=비실비허 非如非異=비여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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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은 어렵습니다. 그러나 <나는 실로 성불해 옴이 한량 없고 가이 없는 백천만억 나유타겁이니라>고 선언하신 부처님의 수명론(壽命論)을 신앙적 바탕에서 접근하면 됩니다.
 
부처님께서는 중생에게 변(變)하는 과, 하지 않는 의 양쪽을 모두 볼 수 있도록 눈을 뜨게 하는 자리를 부처님의 수명론(壽命論)에 근본을 두셨습니다. 그리고 어느 한쪽에 치우쳐서 다른 한 쪽을 보지 못하는 그런 좁은 단절된 생각에서 벗어나 전체를 보게 하셨습니다. 상대적 대립이나 갈등이 소멸된 대조화(大調和)가 전제된 삼원론(三元論) *중도(中道)를 열어 주셨습니다.
 
<여래는 진실과 같이 삼계의 상(相)을 알고 보아 생사에 혹은 물러가고 나옴이 없고, 또는 세상에 있는 자도 멸도하는 자도 없으니,>------ 하는 대우주의 영원한 실상(實相)부처님의 수명론 분상에서  circle03_darkgreen.gif 사비(四非)에 눈을 뜨게 해주셨습니다.
우리가 세상살이를 눈앞의 것만 전부로 보고 있는 것과 같은,   금생만을 내 생명의 전부로 알고 있는 단절론(斷絶論)이 아니라, 대우주라는 본체론으로 눈을 뜨게하는 것이 사비(四非)입니다.
 
무릇 중생은 선(善)악(惡)을 분별하고, 삼계를 차등(差等)하고 분별하여 -기다아니다나는 잘났다너는 못났다--고 일체를 차별로 보고, 만에 하나라도 자기가 보편성에서 떨어진다거나ㆍ또는 어떤 사회 정서적 기준치에 들지 못하면ㆍ상대적 차별로 괴로워하고ㆍ스스로 고통을 받고ㆍ또는 누구를 원망한다거나 하여 불평불만이라는 늪으로 스스로 빠져 들어갑니다.
 
부처님의 수명론 분상에서 <삼계의 상을 알고 보아 생사에 혹은 물러가고 나옴이 없고, 또는 세상에 있는 자도 멸도하는 자도 없으니>라고 한결같이 평등으로만 일체를 보십니다. 중생이 보는 것처럼 갖가지 차별로 보지 않으십니다.
삼계 중생, 구계(九界) 중생이 다 부처님의 제도를 받아야 할 대상이라는 전제하에, 언제나 중정(中正)으로 사물의 진정한 상을 보시고, 구제 대상에 따라  circle03_darkgreen.gif 시각(視角)을 달리하여 구제의 손길을 펴시며 대우주의 실상(實相)  사비론(四非論)을 말씀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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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ffeecup_skyblue.gif            circle03_darkgreen.gif  사비(四非)
 
천태대사께서는, 비실비허(非非虛),  실(實)도 아니고 허(虛)도 아니며,  비여비이(非非異), 같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다.-는 문구에서, <아닐비(非)>자  네 개만을 뽑아서 사비(四非)라고 함축(含蓄)시켜서 <큰 하나> 부처님 자리를 말씀하셨습니다
 
비실비허(非)- 비여비이(非)에서 <(實)이다ㆍ(如)다> 하는 것은 평등(平等)을 말합니다. <열매실(實)같을 여(如)>자는 불변(不變), 즉 상주불변체(常住不變體)라고 하여 영원토록 치 않는 부처님 자리를 뜻합니다.
 
<(虛)다ㆍ (異)다> 하는 것은 차별(差別)을 말합니다. <빌허(虛)다를이(異)>자는 무상(無常), 즉 변화(變化)를 말합니다. 물질세계의 무상(無常)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허(虛)변화(變化)요, 실(實)불변(不變)입니다. 하지 않는 것입니다.   여(如)는 영원한 존재(存在)  상주(常住)요, 이(異)무상(無常)을 뜻하는 변화(變化)입니다. 어느 쪽에도 치우쳐서는 안된다는 것이 사비(四非)가 갖고 있는 함축된 깊은 뜻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얼굴 형체는 다 같습니다. 얼굴 위쪽에 눈이 있고ㆍ가운데 코가 있고ㆍ아래에 입이 있고ㆍ양 옆으로 귀가 있습니다. 수십억의 얼굴이라는 형상은 똑같은 평등(平等)입니다. 그러나 똑같은 얼굴은 하나도 없고 수십억의 얼굴이 제각기 다릅니다.
즉 인간이라고 하는 평등 가운데, 얼굴이 제각기 다릅니다. 그것이 차별(差別)입니다.
 
< 실(實)이다ㆍ여(如)다> 하는 평등면(平等面)과, <허(虛)다ㆍ이(異)다> 하는 차별면을 다 보고, 어느 쪽에도 집착하지 않고 양면(兩面)을 통관하는 *지혜를 열어 상대적 대립에서 벗어나라는 것이 법화경의 *중도(中道)의 삶, 사비사상(四非思想)입니다.
 
(如)라고 하는 변하지 않는 면  상주(常住)만 보아서도 안되고,   (異)라고 하는 변하는 면 무상(無常)만 보아서도 안되고, 순간 순간의 변화가 점철되어 한 줄기로 이어지는 영원한 큰 존재(存在)를 체감하라는 것이 사비(四非)의 개념이요 영원성의 삶입니다.
 
중생 분상에서 보면 인생은 항상 변화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인생은 허망하다 무의미(無意味)하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는 것이 사비(四非)가 품고 있는 깊은 뜻입니다. 우리가 실(實)이다ㆍ여(如)다 하는 변하지 않는 평등면(平等面)을 추구한다 해서, 허(虛)다ㆍ 이(異)다 하는 차별면(差別面)을 가벼이 여겨도 좋다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가진 존재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몸은 때가 오면, 스스로 소멸됩니다. 현세의 생명은 영원한 생명 분상에서 보면 찰나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금생 육신의 생명을 가벼이 여기라는 것이 아닙니다. 물질이라는 육신의 생명은 부처님의 수명론과 찰나에 통합니다.
 
발전소에는 고압송전실이라는 것이 있어서 고압의 전력을 먼 곳까지 고압선을 통해 보냅니다. 고압선이 변전소를 거쳐서 우리네 가정으로 들어오기까지 그 전선은 끝없이 깁니다. 만약에 본선에서 내집으로 따로 끌어들인 전깃줄이니까, 내 맘대로라 하고 전선의 어느 한 점을 살짝 끊어 놓고, --그까짓 것 조금 끊어진 것 뿐인데, 뭐 대수냐, 발전소에서는 고압전력을 계속 보내주는데, 무슨 걱정이냐, --하고 가벼히 여긴다면 내집에 전기가 들어 오겠습니까 ? 그와 같이 금생 육신의 생명이 부처님의 수명론과 단절되어 따로 독립되어 있지 않습니다.
 
실(實)이다ㆍ여(如)다 하는 하지 않는 평등면(平等面)을 추구한다 해서, (虛)다ㆍ(異)다 하는 차별면을 가벼이 여겨도 좋다는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을 다시 말씀드립니다. 그렇기 때문에하지 않는 근본적인 것을 인정하는 동시에, 끊임없이 하고 해서 나타나는 하나 하나도 결코 가볍게 보아서는 안된다는 것이 사비(四非)입니다. 삼원론(三元論) 중도(中道)입니다.
 
대생명체 부처님의 수명론 분상에서, 세상에 있는 자도ㆍ멸(滅)하는 자도 없습니다. 이 세상에 생존하는 사람이나ㆍ죽어가는 사람이나ㆍ육신 차원에서는 변화가 있으나, 부처님의 수명론 분상에서는 다만 형태가 달라졌을 뿐, <큰 하나> 영원한 대생명이라는 본질상으로는 아무런 변화가 없습니다.
 
비근한 예로, 주전자에 물을 붓고 끓이면 수증기(水蒸氣)가 되어 아무 것도 남지 않습니다. 그러나 수증기로 변한 물은 공중의 어딘가에 구름 또는 이슬이라는 다른 형태로 떠있습니다. 물의 본질이 아주 없어진 것이 아닙니다. 물의 형태가 달라져서 보이지 않는 것과 같이, 세상의 모든 것이 하여 형태가 바뀌는 것 뿐입니다. 눈에 보여진 현상이 변화하는 것 뿐입니다. 아주 없어지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지금 우리가 이목구비(耳目口鼻)를 갖추고 살아있는 금생 육신도 우리가 살아가는 한 형태에 불과한 것입니다. 부처님의 수명론 분상에서 영원한 생활 가운데의 한 과정이요 찰나입니다.
 
대우주의 본체 분상에서는 불생불멸(不生不滅)  부증불감(不增不減) *천지기운 생명전자일 뿐입니다. 다만, 형태가 달라질 뿐, 본질본체상으로는 추호도 불어나지도 않고 줄지도 않는 *천지기운입니다. 부처님의 수명론 분상에서 세상에 나타났다든가 없어졌다든가 하는 것은 없습니다.
 
천태대사께서는  비실비허(非非虛), 비여비이(非非異), 사비(四非)에 대해 좀더 이해를 돕기 위해   circle03_darkgreen.gif 삼체(三諦)와 삼관(三觀)이라는 성어(聖語)로 쉽게 풀어 놓으셨습니다.
 
                 circle03_darkgreen.gif  삼체삼관(三諦三觀)
 
삼체(三諦)라는 것은 ① 공체(空諦)    ② 가체(假諦)     ③ 중체(中諦)를 말합니다.
 
공체(空諦)라는 것은,  대우주 삼라만상은 공무(空無),   아무 것도 없이 텅비어 있다는 것입니다. 어느 한 물건도 실재(實在)한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공체(空諦)라 합니다.
 
가체(假諦)라는 것은,  한 물건도 실재한 것이 아니지만, 그러나 모든 현상(現狀)은 분명하게 우리들 눈에 뚜렷이 보여지고 있습니다. 그것을 가유(假有)라고 합니다.  그것을 가체(假諦)라 합니다.
 
중체(中諦)는 것은, 이와 같이 모든 법(法)공체(空諦)도 아니고 가체(假諦)도 아니고, 그러니까, 공(空)도 아니고 유(有)도 아니며, 또 공(空)가운데 유(有)가 있는가 하면, 유(有) 가운데서 공(空)이라는 본질을 정확히 포착하는 것입니다. 그 본질을 중체(中諦)라 합니다.
 
삼관(三觀)이라는 것은,  공관(空觀)    ② 가관(假觀)    ③ 중관(中觀)을 말합니다.
 
공관(空觀)이라는 것은, 앞의 삼체(三諦)에서 공체(空諦)를  마음의 눈으로 관(觀)하는 것을 말합니다. 즉 *부처님의 지혜(智慧)에 의지하여 경계를 비추어 보는 것을 공관(空觀)이라 합니다,
 
가관(假觀)이라는 것은, 앞의 삼체(三諦)에서 가체(假諦)를  마음의 눈으로 관(觀)하는 것을 말합니다. 즉 부처님의 지혜(智慧)를 바탕으로 경계를 비추어 보는 것을 가관(假觀)이라 합니다.
 
중관(中觀)이라는 것은, 앞의 삼체(三諦)에서 중체(中諦)를  마음의 눈으로 관(觀)하는 것을 말합니다.
부처님의 지혜(智慧)로써 경계를 비추어 보는 것을 중관(中觀)이라 합니다.
 
 <한량 없고 가이 없는 백천만억 나유타겁>이라는 부처님의 수명론 분상에서, 삼체(三諦)라는 것은, 이치(理致)에 대(對)하여 그 실상(實相)을 말씀하신 것이고,  삼관(三觀)은 평등과 차별을 분명히 보는 부처님의 지혜(智慧)에 대해 말씀하신 것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부다가야의 보리수 아래서 대우주진리를 체득하시고 제일성(第一聲)으로 하신 말씀이-- 우리가 살고 있는 현상 경계는 항상 무상하게 변해가고 있다. 찰나찰나 시시각각으로 변하지 않는 것이 없다--무상(無常)을 말씀하신 것을 공체(空諦)라 합니다. 그러나, 중생의 눈에는 일체가 공(空)이 아니고, 낱낱이 모든 물체가 존재하고 있습니다,
 
여기 컴퓨터도 있고, 노트도 있고ㆍ가족이 모여 사는 작은 집도 있고ㆍ산도 있고ㆍ강도 있고ㆍ올림픽대교도 있고ㆍ가로수도 있습니다. 일체가 엄연히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이 영원토록 있는 것이 아니고 무상(無常)을 전제한 것들입니다.
일정 기간 동안 존재한다고 하는 시한성(時限性)을 가지고 있는 가체(假諦)라는 것들입니다.
 
특히 우리들 중생은 동해물과 마르고 닳도록 살지 못하고 언젠가는 무상의 습격을 받고 기약없이 죽는 무상체(無常體)입니다. 그렇듯 잠시 잠깐 인연따라 생겨 나왔다가 늙고 병들어 죽는 인간을 비롯하여 일체의 모든 사물이 존재했다가 없어지는 가체(假諦)라는 것들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있다(有)는 것에만 치우쳐도 안되고, 없다(無)는 것에만 치우쳐도 안된다고 하셨습니다. 즉  있는 듯 없고(無), 없는 듯 있는 것(有)중체(中諦)라 하셨습니다.
 
*천태대사께서는 중체(中諦)를 달리 *진공묘유(眞空妙有)라는 성어(聖語)로 중생으로 하여금 의식의 눈을 뜨게 하셨습니다. 즉 부처님 자리 <큰 하나>  *진여(眞如)를 달리 진공묘유(眞空妙有)라 하셨습니다.
 
진여(眞如)라는 부처님 자리는 <요요적적(耀耀寂寂) · 쇄쇄낙낙(灑灑落落)>한 자리입니다. 물 뿌린 듯, 티끌 하나 일지 않고 편안합니다. 일체의 번뇌 망상이 끼지 않고 거리낌이 없는 *적정 자리입니다. 헐떡거리지 않고 항상 한 맛  일미(一味)입니다. 희비애락(喜悲哀樂)이 없습니다. 기쁨과 슬픔과 애처러움과 즐거움이 찰나찰나 생멸(生滅)하는 그런 따위의 파장이 없습니다. 있는 듯 없고 없는 듯 있는 그러한 진공묘유(眞空妙有)를 터득하면, 부처님 자리입니다.
 
일체 만유는 있다는 것에만 고정 지어서 단언해도 안되고, 없다고 하여 허무한 것이라고 고정 지어서 생각해도 안된다는 것이 부처님의 수명론 자리입니다.  있는 듯 없고, 없는 듯 있는 것이라는 것을, 부처님께서는 *법화삼부경 전편을 통해 면면히 말씀하셨습니다.
 
진공묘유라고 法華經에서 말씀하시는 공개념(空槪念)이 우리들 범부에게는 어렵더라도, 이 우주에서 최초로 정각을 여신 부처님께서, <한량 없는 백천만억 나유타겁>에 성불하셨다는 수명론을 믿고, 부처님의 수명론우리의 삶이라는 변화에 전제되면 어려움이 없습니다.
 
*법화경 비유품 제3에서,-----사리불아, 너도 오히려 이 경(經)에는 믿음으로써 들어와 얻었으니 하물며 다른 성문이랴. 그 다른 성문도 부처님 말씀을 믿는고로 이 에 순종함이요, 자기의 아는 분수가 아니니라. ---고 하셨습니다.
 
 부처님의 말씀을 다시 풀어서 말씀드리면,--사리불아, 남들이 너를 지혜제일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네가 法華經 들어와 요달할 수 있었던 것은, 너의 지혜가 아니라, 믿는 마음이 앞서 있었기 때문에 네가 法華經을 받아드렸느니라. 네가 바라문교에 있을 때, 500명의 제자를 거느렸다는 그런 바라문의 철학으로는 어림도 없다. 나는 세상을 편안하게 하고자 세상에 나왔느니라. 法華經깊은 지혜를 위해 설(說)하는 것이니, 천박한 지식을 가진 사람은 迷惑해서 알지 못하느니라. 일체 성문벽지불은 이 에는 미치지 못하느니라. 사리불아, 너는 나를 믿는 신심 하나로 法華經에 들어왔느니라. 믿음이 소중한 것이다. ---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까 부처님의 *십대제자(十大弟子) 가운데, 상근기(上根機)에 속하는 *지혜제일(智慧第一)이라는 사리불존자 <이 경에는 믿음으로써 들어와 얻었다(以信得入=이신득입)>고, 부처님께서 法華經  비유품 제3을 통해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동서양의 수많은 성자철학자가 등장하였어도 부처님께서 설파하신 삼체삼관을 아니다ㆍ틀렸다ㆍ하고 부정하고 나온 사람이 한 사람도 없다는 것을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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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dea.gif    잠깐 !        circle03_darkgreen.gif 시각(視角)
 
어느 흉년에 가난한 사람이 친구를 만났습니다. 친구는 반갑다면서 하는 말이,--이 어려운 흉년에 어떻게 지내는가--라고 물으니까, 가난한 사람은 --걱정 없네, 아이들은 외가집에 보내고, 집사람은 친정에 보냈네.--라고 대답했습니다. 친구는 다시 -너는 어떻게 할 작정인가-라고 하니까, 가난한 사람은,--걱정 없네, 나도 내일이면 처가집에 가네--라고 하더랍니다.
 
아이들 관점(觀點)에서 외가집이라고 말하는 것이나, 아내 관점에서 친정이라고 말하는 것이나, 남편 관점에서 처가집이라고 말하는 것이, 각기 다른 곳을 가르키는 것 같지만, 실은 그 가난한 사람이 찾아가는 곳은 아내와 아이들이 찾아간 <한 곳>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와 같이 부처님의 가르치심에는 수많은 용어가 등장합니다. 방편의 가르치심이다 · 진실의 가르치심이다 · 사비다 · 삼체삼관 (三諦三觀)이다 ·진공묘유(眞空妙有)·  많은 용어가 등장하여 산만하고 통일성이 없는 것 같지만, 실은 부처님의 수명론 분상에서 현재는 물론 뒤를 이어 나오는 미래 중생을 다 구제하신다는 것을 전제하고, 그때 그때 중생의 용망과 성품과 정서에 따른 눈높이에 맞추어 적절한 표현을 쓰신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일체 중생을 모두 제도하셔서 우리가 사는 *사바세계를 부처님의 정토(淨土)로 건설하신다는데 근본 목적, 비전이 있다는 것을, 부처님의 가르치심을 통해 중생이 깨닫게 되면, 누구던지 편안한 마음으로 공동체(共同體) *홍익의식으로 자유롭고 평화롭게 살 수 있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法華經에 등장하는 모든 성어(聖語)는 부처님께서 중생을 한 사람도 빼놓지 않고 제도하기 위해 중생이 알아 듣는 말로 중생의 시각(視角)과 근기따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중생의 근기따라 여러 가지 용어로 표현하신 것입니다. 일체 중생을 부처님 자리로 들어오게 한다는 구제선언을 시각(視角)을 달리해서 여러 가지 법구로 변화시켜 말씀하십니다 .
 
종일다출(從一多出) 종다귀일(從多歸一)입니다. 하나는 많은 것을 낳고 많은 것은 하나로 돌아가는 대우주의 근본 질서를, 을 듣는 대상에 따라 이렇게 저렇게 용어 표현이 각양각색일 뿐, 근본은 <큰 하나> *천지기운 생명전자 나타내는 것 뿐입니다.
 
동서양에 등장한 종교ㆍ과학ㆍ문학ㆍ수학 등의 일체의 학문이 *법화경 여래수량품에 바탕을 두고 수없이 파생되어 나갔다가, 다시 法華經 여래수량품으로 귀일합니다. 대우주 대생명체라는 천지기운을 부드럽게 본불 석가세존이라고 인격화하여 중생의 정서에 맞추어 하신 것이法華經 여래수량품입니다
 
그러니까 누구던지, 농부이거나ㆍ상인이거나ㆍ공무원이거나ㆍ선생님이거나ㆍ국회의원이거나ㆍ정치인이거나 관계 없이 종일다출(從一多出) 종다귀일(從多歸一)이라는 원칙론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내가 무엇을 할 것인가를  사비관(四非觀)으로 답을 구하며 살아간다면 행복한 삶이 보장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