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이나와 여러 중승(衆僧)이 함께 영축산(靈鷲山)에 나와 내가 중생(衆生)에게 말하되, 항상 여기에 있어 멸(滅)하지 아니하건만, 방편력(方便力)을 쓰는고로 (滅)과 불멸(不滅)이 있음을 나타내노라. -----*법화경 여래수량품 제 16에서
 
   
 
 무량의경(無量義經) 설법품-2-02-03
 
-------이와 같은 *무상(無相)(相)이 없고 (相)이 아니니라.
(相)이 아니며 상(相)이 없음을 실상(實相)이라고 하느니라.-------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는,----지금부터 <(相)이 없음(無相)>과 <(相) 아님(不相)>에 대해서 설하고자 한다. 먼저 <(相)이 없다(無相)>라는 것은 차별을 떠난 본성(本性)을 말하는 것이다. 다음 <(相) 아니다(不相)>라는 것은 차별적으로 나타나기는 하지마는 그 차별로 그치지 않는 것이다.   <없음(無相)>은 본래의 성질을 말하는 것이고, <아님(不相)>은 그 작용을 말하는 것이다. 무릇 모든 인간은 부처님이 될 본성,  *불성을 가지고 있다. 이것이 <(相)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은 악(惡)한 사람착한 사람- 하는 차별을 하지마는 한 사람이 언제까지나 한 사람으로 있는 것이 아니고, 또한 어리석은 사람이 언제까지나 어리석은 사람으로 있는 것이 아니다. 이것이 <(相)이 아니다>라는 것이다. 그래서, 일체는 *중도(中道), *불사선(不思善) 불사악(不思惡)이다.--
 
모든 차별을 떠난 것이 사물의 진실한 입니다, 그래서 *일체중생구제론,   모든 인간은 다 구원 받아 모두 부처님의 경지에 이르게 되는 것이 진실한 相입니다.  이 사바세계가 결국은 적광정토화(寂光淨土化)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것이 진정한 相인 것입니다. 물론 당장은 아니더라도 *구원실성 부처님의 수명론 분상에서 모든 인간은 다 구원 받아 부처님의 경지에 이르게 된다는 것을 확고하게 파악하는 것이 모든 법의 실상(實相)을 아는 것입니다.
 
-----보살마하살이 이와 같은 진실한 상(相)에 편안히 머물러서 일으키는 *자비는 밝고 밝아서 헛되지 아니하리라. 중생에게서 참으로 능히 고(苦)를 뽑음이라. 고(苦)를 이미 뽑고는 다시 법을 설해서 모든 중생으로 하여금 쾌락을 받게 하라. ----
 
--- 모든 보살은 모든 부처님의 일체중생구제론 사상을 뒤를 이어오는 모든 사람에게 전하여 모든 중생을 부처님이 되는 길로 인도해 주는 것이다. 그것이 남을 위해 세상을 위해 사는 보살의 덕목이다. 모든 보살은 장사를 하거나ㆍ노동을 하거나ㆍ어떤 처지에 있거나ㆍ진실의 도(道)를 배워서 마음 가짐을 바로하여 중생으로 하여금 괴로움의 근본 온갖 미혹(迷惑)을 없애주고 안락한 생활,  의의(意義) 있는 나날을 보내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괴로움을 뽑고 쾌락을 주는   발고여락(拔苦與樂)>이 부처님의 구제원력(救濟願力)이다. ----
 
-----선남자야, 보살이 만일 능히 이와 같은 일체의 법문 *무량의를 닦는 자는 반드시 속히 아뇩다라삼막삼보리를 얻어 이룩하리라. ----
 
-----만일 보살모든 부처님의 마음,  일체중생구제론을 받아 가지면, 한량 없는 작용으로 많은 사람에게도 각각 이익을 주고 또 남을 구원할 수 있는 힘도 줄 수 있다.  수행의 *과보 *부처님의 지혜를 성취하여 부처님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
 
------선남자야, 이와 같이 심히 깊고 위없는 대승의 무량의경(無量義經)은 문리(文理)가 진정(眞正)하고 존귀하여 다시 더할 바가 없느니라. 삼세(三世)의 모든 부처님께서 함께 수호(守護)하시는 바이니, 여러 *마(魔)의 무리들은 도(道)를 얻어 들어오지 못하며, 일체의 사견(邪見)과 생사(生死)에서 이를 무너뜨리지 못하리라. ----
 
 ----무량의의 이치는 범부의 경지를  벗어나서 차차  부처님의 경지에 이르는 길을 가르쳐주시는 것으로 진실 그 자체다. 무량의 삼세의 부처님,  과거ㆍ현재ㆍ미래의 세상에 나오실 모든 부처님이 다같이 보호하신다. 삼세의 모든 부처님의 마음으로부터 나오는 이 가르치심이 널리 세상에 행해져서 모든 사람이 부처님의 경지에 이르도록 해주신다. 모든 사람들은 부처님 경지에 도달하기 까지는 절대로 노력을 멈추지 않겠다는 굳은 신념을 가지고 있으면 어떤 악마라 하더라도 조금도 방해하지 못한다. 모든 악마나 *육사외도(六師外道)의 무리도 감히 범하지 못하고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 뿐만 아니라,  바른 길에서 어긋나는 사견(邪見)이나 모든 생사(生死) 곧 인생의 온갖 변화나ㆍ주위의 압력이나ㆍ주위의 사정에 의해 그 믿음이 무너지지 않는다.----
 
-----선남자야, 이런 고로 *보살마하살이 만일 속히 무상보리를 이룩하고자 하면, 응당 이와 같이 심히 깊고 위없는 대승(大乘)의 무량의경을 닦고 배울지니라. ----
 
----모든 제자들아, 만약 보살이 *무상보리,  부처님과 같은 지혜를 얻고자 생각한다면, 모든 부처님의 마음에서 나오는 뜻이 깊고 거룩한  무량의경설(說)해 있는 바와 같은 마음을 가지고  수행을 꾸준히 쌓아가야 한다.----
 
----그 때 대장엄보살이 또 부처님께 말씀하되, 세존이시여 세존의 설법은 불가사의요, 중생의 *근기와 성품도 또한 불가사의(不可思議)라, 법문 해탈도 또한 불가사의 옵니다. 우리들은 부처님께서 설하신 모든 법에 다시 의심과 어려움이 없다 할지라도, 그러나 모든 중생이 미혹한 마음을 내는 까닭으로 거듭 세존께 여쭈옵나이다.---
 
----부처님이시여, 부처님께서 생주이멸(生住異滅),  *사상  제법(諸法)의 실상(實相)을 말씀하셨는데, 너무도 넓고 또한 깊어서 그 뜻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기가 참으로 어렵습니다. 중생의 근기나 성질도 한없이 여러 가지여서, 모든 법의 실상을 하나하나 알아서 분별한다는 것도 또한 참으로 어렵고 그 가르치심을 듣고 잘 수행하여 세상의 괴로움이나 번뇌(煩惱)에서 벗어나는 방법도 여러 가지가 있어서, 어느 것을 따라야 할 것인가를 판단하여 알기가 또한 어렵습니다. 그러나 저희들은 오랜 동안 세존을 모시고 세존의 가르치심을 들어 왔으므로 부처님께서 하신 말씀에 대해 조금도 의심이 없습니다. 그러나  부처님의 가르치심을 많이 듣지 않는 사람은, 도대체 부처님의 가르치심의 중심이 어디에 있는가 하는 의혹이 생길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가르치심해 주실 때마다 언제든지, <이것은 중요한 것이요 가장 큰 공덕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또한 가르치심을 들어 보면, 어느 것이나 다 크게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또 이것이 가장 훌륭한 것이라고 하셨는데, 과연 어느 것이 가장 훌륭한 것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다시 부처님께 여쭈옵나이다.---
 
-----여래께서 득도(得道)하신 지 이미 40 여 년에 항상 중생을 위하여 모든 법의 *네 가지 상(四相)의 뜻과ㆍ고(苦)의 뜻과ㆍ공(空)의 뜻과ㆍ무상(無常)ㆍ무아(無我)ㆍ무대(無大)ㆍ무소(無小)ㆍ무생(無生)ㆍ무멸(無滅)과ㆍ일상(一相)ㆍ무상(無相)ㆍ법성(法性)ㆍ법상(法相)ㆍ본래공적(本來空寂)과ㆍ불래불거(不來不去)ㆍ불출불몰(不出不沒)을 연설하심이라.-----
 
---부처님께서 부다가야에서 깨달음을 얻으시고 부터, 세상에 나서서 가르치심을 설하기 시작하신지 이미 40 여 년이 지났습니다. 그 동안에 중생을 위해 모든 법의 네 가지 형태의 뜻해주셨습니다. 세상에 살면서 근본되는 네 가지 가르치심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 네 가지는, 곧    <①고(苦)ㆍ②공(空)ㆍ③무상(無常)ㆍ④무아(無我)>입니다. 그리고 무대(無大)   무소(無小)   무생(無生)   무멸(無滅)과,  일상(一相)무상(無相)법성(法性)법상(法相)본래공적(本來空寂)과,  불래불거(不來不去)불출불몰(不出不沒)해주셨는데, 이것은 다 <(苦)(空)무상(無常)무아(無我)>를 되풀이 하신 것입니다. 부처님이시여, 크다작다 하는 차별은 일시적인 현상이라는 것과절대의 진리는 크고 작은 형태에 얽매이지 않는다는 것과생멸의 변화있기는 하지마는 오직 하나 *상주불변체가 있는데 그것은 차별상을 떠난 것이므로 무상(無相)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모든 사물의 진실한 성질,  법성(法性)모든 사물의 나타나 보이는 진실한 모양, 법상(法相)그리고 절대의 이치라는 것은 본래 공적(空寂)해서 영원히 변하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모든 중생의 괴로움을 가르치심으로 뽑아주시고자 모든 법의 실상을 낱낱이 해 주셨습니다.---
 
----만일 듣는 자가 있으면 혹은 *난법(煖法) 정법(頂法)세제일법(世第一法)과, 수다원과(須陀洹果) 사다함과(斯陀含果)와, 아나함과(阿那含果) 아라한과(阿羅漢果)와, 벽지불의 도(道)를 얻어 보리심을 일으키어 *제일지(第一地)제이지제삼지에 올라 제십지에 이름이라.----
 
---부처님께서는 중생의 근기 따라 *사가행과,   사과(四果)와 벽지불과 보리심을 일으켜 남을 위해 세상을 위해 사는 *보살의 십지수행을 설하셨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얕은 가르치심을 설하시지마는, 그 얕은 교(敎)로 그치는 것이 아니고, *사실단 방법론으로, 곧 얕은 를 실마리로 해서 더 깊은 가르치심으로 인도해주셨습니다.---
 
   
 
       제법(諸法)의 실상(實相)     실상(實相) →* 중도*① 공(空)     불교성경-p173~p179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꽃은 필 인연이 모여서 피고, 잎은 떨어질 인연이 모여서 떨어진다. 그러므로 혼자 피고 혼자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緣)에 의지하여 떨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어떤 것이라도 다 변천하며, 무엇이나 홀로 있어 영원할 수 있는 것은 없다. 이 모든 것이 에 의지하여 나고 에 의지하여 없어지는 것이다. -- 반야경에서--
 그러므로 모든 것은 변천하게 마련이어서 영원할 수 있는 것은 없다. 이 변천(變遷) 무상(無常)은, 천지(天地)간의 움직일 수 없는 *진리이고, 영구히 변할 수 없는 이치이다.---- 반야경에서--
 
모든 경계와 사물(事物)은 다 인연에 의하여 나타난 것이기 때문에 본래 차별이 없는 것이다. 차별을 보는 것은 중생의 분별(分別) 망상(妄想)이다. 허공에는 동(東)과 서(西)의 차별이 없지마는 중생이 동서(東西)의 차별을 생각해서 동(東) 서西)로 나누어 *집착한다.  ----화엄경에서 ---   
산수(算數)의 수는 하나로부터 어떤 수(數)에 이를지라도 다 완수(完數)요, 적고(小) 많음(多)의 차별이 없건마는, 중생은 욕심으로 이를 분별해서 적고 많음을 분별하는 것이다.---화엄경에서 --- 
(生)도 없고 멸(滅) 없건마는 선악(善惡)의 차별(差別)을 보는 것이 중생의 분별 망상이다. 그렇기 때문에 부처님은 이 차별을 떠나서 뜬 구름과 같고ㆍ환(幻)과 같고ㆍ얻는 것이나ㆍ잃은 것이나ㆍ다 허망(虛妄)한 것으로 보아 마음으로 헤아리고 분별(分別)하는 일을 여의고 계시다. --화엄경에서--
중생은 분별 망상으로써 모든 물건과 경계를 *집착한다. 부귀(富貴)를 집착(執着)하고 목숨을 집착한다.
사(邪) 등 모든 것에 집착하여, 어리석고 망녕됨을 거듭하여 괴로워 하고 번민한다.----능가경에서--
 
여기에 어떤 사람이 있어 멀고 먼 여행을 계속하다가 어떤한 곳의 큰 호수(湖水)를 보고, <이 호수의 이쪽 언덕은 위태로우나 건너편 언덕편안하다. 그러나 배도 없고 다리도 없다. 그러므로 갈대와 나무 가지며 잎사귀를 모아서 뗏목을 만들어 이 뗏목을 타고 저쪽 언덕으로 건너 가리라> 생각하고, 뗏목을 만들어서 그 뗏목을 타고 편안히 저 언덕에 가서 생각하기를, <이 뗏목이 나를 편하게 이 언덕까지 건네 주었다. 큰 공이 있는 뗏목이다. 그러므로 이런 공덕이 있는 뗏목을 어찌 버리고 가랴> 하고, 뗏목을 어깨에 메고 목적지까지 간다고 하자. 이런 경우에 이 사람이 뗏목에 대하여 할 일을 다 하였다고 이를 것인가? 그렇지 않다고 하겠다. 그러나 이 사람이 만일, <이 뗏목을 타고 내가 편안히 이쪽 언덕까지 왔으니까 이제는 다시 소용이 없으니, 이 뗏목을 언덕 위에 올려놓거나 다시 물 가운에 띄어 버리고 내가 갈곳으로 가리라> 생각하고 가 버린다면, 그 사람은 뗏목에 대하여 할 일을 다 했다고 말할 수 있다.  이 비유는 바른 일에도 집착하지 않고 버리지 않으면 아니 되겠거늘, 하물며 옳지 못한 것이야 더 말하겠는가. 옳지 못한 일은 모두 다 버리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파리중부에서
 
병(甁)은 깨지는 물건이기 때문에 이라는 실체는 없는 것이다. 실체가 없는 을 실체가 없는 것이라고 알고 집착을 떠나는 것은, 옳은 일도 오히려 버리는 것과 같다.
그렇기 때문에 더구나 실체 없는 을 실체가 있다고 보는 것은 어떻겠는가. 이것은 토끼의 뿔이며, 석녀(石女) 자식과 같이, 이름은 있으나 실체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름만 있고 실(實)이 없는 줄로 알아 집착을 떠나는 것은 옳지 못한 일을 버리는 하나의 도리(道理)이다. 모든 사량 분별과 쓸데 없는 이론(理論)을 여의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치신 도리의 근본이다.----파리중부에서--
 
모든 것은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오는 것도 아니요, 가는 것도 아니요, 나는 것도 아니요, 멸(滅)하는 것도 아니다. 따라서 얻는 것도 없고, 잃는 것도 없다. 그러나 생(生)도 아니요, 멸(滅)도 아니라 할지라도 이교도(異敎徒)가 말하는 불생불멸(不生不滅)과는 다르다.
왜냐 하면 이교도들은 물질에는 실성(實性)실상(實相)이 상주(常住)하고 있어서 나지도 않고 변하지도 않는다고 말하는 까닭이다. ----능가경에서---
부처님은 모든 것과 모든 사물의 본성공(空)하여 유무(有無)의 범주(範疇)를 여의고 있기 때문에, 있는 것도 아니고 하는 것도 아니라고 말씀하신다.
다시 말하면, 모든 사물은 인연으로 성립(成立)하여 그 본성(本性)에 실재성(實在性=주체를 가진 독립된 존재)이 없기 때문에 유(有)가 아니라고 말하고, 또는 인연으로 성립되었기 때문에 아주 공무(空無)한 것이 아니므로 도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다. 사물의 모양만을 보고 여기에 집착하는 것은 미망(迷妄)의 생(生)을 부르는 인(因)이 된다. 만약 나타난 모양인 을 보지 아니하면 분별과 망상이 일어나지 않는다.---능가경에서---
깨달음이라 하는 것은 이러한 진실한 도리(道理)를 보고 분별심(分別心)을 버리는 일이다.---능가경에서---
참으로 세상 일은 꿈같고 재물 또한 허깨비와 같다. 그림에 보이는 산수(山水)는 높고 낮은 것이 뚜렸하게 보이지마는 실제로 있는 것은 아니다. 모든 것이 저녁노을의 햇빛과 같다.---능가경에서---
헤아릴 수 없는 인연에 의하여 나타난 사물을 영원히 그대로 존재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상견(常見)이란 이름을 붙일 수 있는 잘못된 견해(見解)요, 또는 필경에 `전부 없어지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단견(斷見)이라고 하는 잘못된 견해이다.
단견과 상견,는 사물 자체의 모양이 아니요, 사람의 마음이 인정(認定)한 형상에 지나지 않는다.---능가경에서---
모든 사물은 본래부터 이 집착의 을 떠나 있기 때문에 허깨비 같고, 해지는 저녁 노을과 같다. 만일 그렇지 않고 사물에 실체가 있다면, 그것은 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이교도들이 말하는 아(我)와 같은 상주(常住)의 것이 될 것이다.
모든 사물은 인연에 의해 일어난 것이기 때문에 다 변화한다. 사물은 실체가 있거나 영원하거나 한 것이 아니다. 변천무상하여 허깨비와 같고 지는 햇빛과 같다. 그러나 실상(實相)에서 보면 무상(無常)한 그대로가 참이요, 변화 그대로가 영원이다. 예를 들면 개천물은 사람에게는 개천물로 보이지마는 물을 불로 보는 아귀(餓鬼)에게는 개천물로 보이지 않는다. 그러므로 아귀에 대해서는 있는 것이라고 말할 수가 없고, 사람에 대해서는 없는 것이라고 말할 수가 없다. 이와 마찬가지로 모든 사물은 다 있다고도 말할 수 없고 없다고도 말할 수 없는, 즉 허깨비와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이 허깨비와 같은 세상을 떠나 따로 진실한 세상과 영원한 세상이 없기 때문에 이 세상을 거짓 정해 놓은 세상으로 보는 것도 허물이요, 진실한 세상으로 보는 것도 허물인 것이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이 허물의 근본을 세상 위에 있는 것으로 알고 있으나 세상이 이미 허깨비라면, 그 속에 헤아리는 마음이 사람의 허물을 낼 이치는 없다. 이 허물은 이런 이치를 모르고 거짓된 세상에서 헤아리는 어리석은 사람의 마음 속에서 일어난 것이다. *지혜 있는 사람은 이치(理致)를 깨달아 허깨비를 허깨비로 보기 때문에 드디어 이러한 허물을 일으키지 않는다.---능가경에서--
 
 
 
                    잠깐 !            circle03_darkgreen.gif 발고여락(拔苦與樂)
 
불교의 대자대비는 한 마디로 발고여락(拔苦與樂)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치심은 <괴로움을 뽑고 쾌락을 주는 것>이 목적인 바, 언제나 양면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여기서 괴로움을 뽑는다는 것은,  괴로움의 근본을 없애주는 것입니다. *견사의 미혹을 제거해 주는 것입니다. 혹자는 미혹이 없어지면 즐거움이 따르는 줄 아는데 그것은 아닙니다. 괴로움이 없는 것이 곧 즐거움이 아닙니다. 여기서 <괴로움을 뽑아 준 다음에 다시 쾌락을 준다는 것>은, 살아가는 그 자체를 보람있게 해 주는 것입니다. 자기의 생활이 보람있는 생활임을 인식하고 만족하는 마음을 일으키도록 해주는 것입니다. 불교에서 쾌락이라는 것은 자기의 노력이 주위 사람들에게 이익을 준다는 자각을 가지는 것입니다. 자기의 노력이 직접 간접으로 주위의 사람들에게 홍익(弘益)이 된다는 것을 진정으로 자각했을 때, 그것은 다른 아무 것과도 바꿀 수 없는 기쁨이라는 생각이 마음에 솟아 오르는 것이 불교에서 말하는 쾌락이요, 바로 남을 위해 세상을 위해 사는 *보살행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남을 위해 세상을 위해 *홍익하는 보살행, 곧 법화경(法華經) *오종법사 실행에 무게를 주시고 그 공덕을 누누히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사람이 보살행을 쌓아서 자기 자신도 참으로 의의 있는 생활을 하고 또 주위 사람들도 의의 있는 생활을 할 수 있도록 인도하는 것이 모든 부처님의 가르치심을 배운 보람이요공덕이요발고여락(拔苦與樂)입니다.
 
                   circle03_darkgreen.gif ①고(苦)ㆍ②공(空)ㆍ③무상(無常)ㆍ④무아(無我)
 
(苦) → 인생은 만족이 없는 라는 것입니다. 생로병사 그 자체가 라는 것입니다.
(空)→인생에는 여러 가지 차별이 있으며, 그 차별은 <한량 없는 과거세 백천만억 나유타겁>에 성불하신 *구원실성 부처님의 수명론 관점(觀點)에서 보면, 일시적인 것이므로 차별을 떠나서 그 근본이 되는 진리를 깊이 생각해야 한다는 것을 전제한 *진공묘유에서 말하는 입니다.
무상(無常)→ 세상이라고 하는 물질세계는 변하지 않는 것이 없으며 언제나 같은 상태로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생주이멸(生住異滅)이라는 무상(無常),  *사상(四相)을 말합니다.
무아(無我)*지수화풍(地水火風)의 집합체인 육신은 인연따라 끊임 없이 변하는 물질이기 때문에 믿을 수가 없습니다. *삼법인에서 말하는 <제법무아>입니다.
무아(無我)라는 말은 두 가지 뜻으로 쓰입니다. 하나 자기라는 것은 일정한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우리의 몸이나 마음은 끊임 없이 변합니다. 자기라는 것이 같은 상태로 있는 것이 아니라, 순간 순간 변해갑니다. 그렇게 변해 가는 것을 언제나 같은 상태로 있다고 생각하고, 거기에 *집착해 있어서는 안된다 하여 무아(無我)라고 합니다. 하나, 자기(自)와 남(他)을 완전히 벗어난 상태로 되는 무아(無我)경지(境地)입니다. 자기와 남을 완전히 초월한 썩 높은 부처님 경지입니다.
 
                 수다원과ㆍ사다함과ㆍ 아나함과ㆍ아라한과=== 사과(四果)
 
수다원과(須陀洹果) → 부처님의 가르치심을 통해 *삼계미혹을 끊어버린 성문의 지위입니다.
사다함과(斯陀含果) →아직 뜻이 견고하지 못해서 자칫하면 뒷걸음질 치게도 되는 지위입니다.
아나함과(阿那含果) →부처님의 교(敎)를 통해 뜻이 견고하여 다시 흔들리지 않는 지위입니다.
아라한과(阿羅漢果)살적(殺賊)이라고 합니다.  번뇌라는 도둑을 말끔히 죽여 없앤 지위입니다.
 
이와 같이 학습수행으로 성문의 단계를 지나 더 나아가면 벽지불,  각(緣覺)의 단계입니다. 여기서 더 나아가면 보리심(菩提心)을 일으키는,  환희지 보살경지에 이릅니다.
보리심이란, 부처님의 지혜를 갖추려는 목적,  비전을 가지고 수행하는 보살의 덕목입니다.   *보살십지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처음에는 *성문의 단계에서 시작하여 *연각의 이르고, 연각에서 다시 *보살의 단계로 나아가 부처님이 되는 것이 불교의 영원한 구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