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 중생이 이미 신복(信伏)하여 질직(質直)해서   뜻이 부드러워  일심(一心)으로 부처님을 친견(親見)하고자  스스로 신명(身命)을 아끼지 아니함이라.-----*법화경 여래수량품 제 16에서
 
   
 
 무량의경(無量義經) 설법품-2-02-02
 
------(法) (相)이 이와 같아서 이와 같은 법을 낳음이라.(法相如是 生如是法)
(法) (相)이 이와 같아서 이와 같은 법이 머무름이라.(法相如是 住如是法)----
 
----모든 사물은 현재의 상태를 정확하게 파악하므로써 그 다음에는 어떠한 일이 생기리라 하는 *인과(因果)를 전제하고   제법(諸法)의 실상(實相)을 알아야 한다. 겨울이 가면 봄이 온다는 것을 알 수 있고, 가물면 곡식이 제대로 안된다는 것은 예측할 수 있으며, 북풍이 불면 기온이 낮아진다는 것을 짐작한다. 인연과보(因緣果報)라고 하는 *십여시를 알아야 한다. 앞으로 어떠한 일이 생기리라는 것을 확실히 알면, 어떤 나쁜 상황이 와도 당황하지 않고 미리 대비한다. 어떤 기간동안 변(變)하지 않고 같은 상태가 계속 되리라는 것,  생겨나고 머무는 생주(生住)의 도리를 알 게 된다---
 
----법의 (相)이 이와 같아서 이와 같은 법을 다르게 함이라.(法相如是 異如是法)
법의 상이 이와 같아서 이와 같은 법을 멸함이라. (法相如是 滅如是法)------
 
 ----세상의 모든 것들은 본래 대로 있지 않고 변한다. 그리고 한 다음에는 그것이 아주 없어지고 또 다른 것이 생기리라는 것도 알 게 된다.  인간계나 자연계가 *사상(四相)    네 가지 모습(四相)으로 변한다.--
 
부처님께서는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  물질세계는 생주이멸(生住異滅)의 영향권에서 벗어나지 못함을 말씀하셨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세상의 모든 모습을 잘 알 게 되면 모든 인간이 진실로 보람있는 생활을 하게 될 것이라 전제하고 모든 사물의 실상을 설(說)해주셨습니다. *구원실성 석가세존께서는 보이지 않는 마음 세계,  <큰 하나> *진여를 말씀하시기 위해 눈에 보이는 물질 세계를 도구로 쓰셨습니다. 에 보이는 사물의 실상,  네 가지 모습으로 한다는 사상(四相)을 통해 *상주불변체, 영원한 생명 *구원실성 영성세계를 열어주셨습니다.
 
----법의 상이 이와 같아서 능히 악법(惡法) 낳게 하며,(法相如是 能生惡法)
법의 상이 이와 같아서 능히 선법(善法) 낳게 함이라.(法相如是 能生善法) -------
 
---생주이멸 사상(四相)의 이치를 알면, 다만 사물이 하는 것 뿐 아니라, 선악(善惡),  좋고 나쁨이 생겨나는 것도 알게 된다. 새로이 생기는 것은 먼저 것보다 좋아진다거나 또는 새로이 생기는 것은 앞의 것보다 나빠진다는 것까지 아는 선악의 구별이 생겨난다. 생명을 가지고 태어난 인간이라는 물체는 인연따라 어느 쪽으로든지 해 간다. 부처님 쪽으로 해 가면 (善)이요, 지옥계 쪽으로 변해 가면 (惡)이다. 부처님 쪽으로 해 가면 잘못 되거나 부족한 것이 적어지며 완전하게 되어감이 을 낳는 것이다.   자기의 행동에 대해서나ㆍ세상의 가지가지 사건에 대해서 완전하게 되어가는가ㆍ불완전하게 되어가는가, 곧 인가ㆍ인가를 구별해 나가는 것이 선법을 낳게 하는 것이요, 악법을 낳게 하는 것이다. 곧 능생선법(能生善法)   능생악법(能生惡法)이다 --
 
----머무르게 되는 것도(住)ㆍ다르게 되는 것도(異)ㆍ멸하게 되는 것도(滅)ㆍ또 다시 이와 같음이라.------
 
---- 을 낳게 하는 것만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다. 머무르고달라지고없어지는 데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좋은 상태로 머물러 있는가나쁜 상태로 머물러 있는가를 알아야 하고, 좋은 방향으로 달라지는가나쁜 방향으로 달라지는가를 알아야 하며, 또 좋게 없어지는가 나쁘게 없어지는가를 알아야 한다. 모든 부처님께서  하시는 *생주이멸(生住異滅)의 원리는 물질세계는 물론, 마음 세계까지도 마찬가지 이니라.--
 
-----보살은 이와 같이 네가지 상(相)의 처음과 끝을 관하여 살피고, 모든 것을 두루 알고다음에 또 일체의 모든 법은 순간순간도 머무르지 않으며(一切諸法  念念不住=일체제법 념념부주)새로이 새로이 나고 멸함을 밝게 관하고(新新生滅 復觀卽時=신신생멸 부관즉시)또는 곧 나고머무르고 달라지고멸함을 관하라.(生住異滅=생주이멸)-----
 
 --- *보살은 나고머무르고달라지고없어지는 생주이멸의 상태를 깊이 관찰해서, 이것을 완전히 파악한 다음에는, 세상의 온갖 사물은 어느 것이나ㆍ자기의 마음 속에 있는 것이나ㆍ물질적인 것이나ㆍ모두 한 순간도 머무르지 않는다는 것을 생각하라. 모든 사물은 단 한 순간도 그대로 있는 것은 없다. 바로 지금 이 눈앞에서 나고머무르고달라지고없어지는온갖 변화가 끊임 없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깊이 명심해야 한다.---
 
<순간순간도 머무르지 않는다>, 우리가 나이를 먹으면 머리털이 희어지고 얼굴에 주름살이 쭈글쭈글해지는데 그것은 어느 날 갑자기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머리털이나 살갗, 그리고 모든 신체 부위가 순간도 쉬지 않고 조금씩 한다는 것입니다. 몇 길 되는 높은 나무도 한꺼번에 우뚝하게 자라는 것이 아니라 순간 순간 끊임없이 자라서 그렇게 커지는 것입니다. 자기의 몸이건주위의 물건이건자꾸만 해가며 절대로 같은 상태로 있지 않습니다. 같은 상태로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주 조금씩 하기 때문에 눈에 잘 뜨이지 않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사물이 어느 방향으로 해가는가 하는 것을 항상 살피라는 것입니다. 극히 작은 변화는 그다지 눈에 뜨이지 않기 때문에 진보(進步)를 해도 그대로 있는 것 같습니다. 또한 퇴보(退步)를 해도 그대로 있는 것 같이 여겨집니다. 일체 모든 사물은 진보를 전제합니다. 좋아지지 않으면  곧 나빠지는 것입니다. 불교의 수행도 그와 같습니다. 방심을 했다가는 어느 사이에 부처님과 멀어진다는 것을 전제하고 항상 *용맹정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새로이 나고 다시 멸한다>란, *성상(性相)이 공적(空寂), *천지기운입니다. 생겼다가는 없어지고 없어졌다가는 다시 생기며 끊임 없이 해가는 대생명체 대생명력의 실상  곧 *진여 본성입니다. 부처님의 경지에 이르고야 말겠다면서도 잠시 불교 수행을 게을리 하는 그 자체도 성상공적(性相空寂)입니다. <이제 나도 어지간히 깨달았다>고 생각하고 방심하면 그 순간 퇴보합니다. 완전히 부처님 경지에 이르기 전에는 잠시도 그대로 있는 것이 없다는 것을 명심하고 불교 수행,    중도(中道) 수행으로 어느 한쪽으로만 치우쳐 마음을 뺏기는 *집착의 노예가 되지 말고 찰나찰나 적응하는 그 변화 자체가  자비입니다. <새로이 나고 다시 멸한다>가 생명입니다.
 
----이와 같이 관하고서 중생의 모든 근기와 성품과 욕망에 들어갈지니라.----
 
 ---인생의 진실한 (相)자연계의 온갖 사물에 대한 근본,  생주이멸이라는 네 가지 모습을 알면 그 다음에는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가르쳐주어 남도 알 게 해야한다. 그런데 남에게 가르쳐 주려면 상대자의 성질을 잘 알아야 한다. 상대자의 정도에 따라 알맞은 것을 하는 것이다. 정도가 낮은 사람에게 어려운 것을 말해도 알아 듣지 못하고, 높은 사람에게 쉬운 것을 말해야 성에 차지 않는다. 상대방의 *근기, 사물을 이해하는 능력과성품과버릇과그리고 무엇을 바라는가하는 욕망을 잘 알아야 한다.----
 
<중생의 모든 근기>란, 사람에 따라서는 사물을 이해하는 능력이 강하거나 또는 약한 사람도 있습니다. 근기가 좋은 사람은 사물을 재빨리 이해하지마는 근기 얕은 사람은 올바르게 이해하지 못합니다. 근기가 수승 (殊勝) 곧 좋은 사람은 쉽사리 핵심을 잘 파악하지마는 근기 얕은 사람은 자질구레한 것만을 가지고 거기에 매달립니다.  상대자의 근기를 분명히 알아서, 그 사람에게 알맞게 *삼주설법 관점에서 가르쳐 주어야 합니다. 사람은 각기 그 성질에 따라 각각 성미가 다릅니다. 급한 사람ㆍ느린 사람ㆍ행동이 재빠른 사람ㆍ행동이 느린 사람ㆍ사물을 신중히 생각하는 사람ㆍ그렇지 못한 사람도 있으므로 상대자의 그러한 성질이나 무엇을 바라고 있는가 하는 욕망 따위를 잘 알아서 그 사람에게 알맞는 교(敎)를 주어 잘 인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 성품과 욕망이 한량 없는고로 설법도 한량이 없느니라.
  * 설법이 한량 없는고로 그 뜻도 또한 한량이 없느니라.--------
 
 -----모든 사람의 성질은 한량 없이 각각 다르고, 욕망도 한량 없이 각각 다르다. 성질과 욕망이 똑같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에게 가르치심을 하려면, 역시 그 하는 방법,  방편도 한량 없이 많다. 똑같은 가르치심을 하더라도 상대의 근기, 듣는 편성질과 욕망에 따라 알맞게 각각 달리 해야 한다. 따라서 그 가르치심의 내용도 한량 없이 많아서 온갖 것을 다 하게 된다.----
 
----무량의(無量義)는 하나의 법(法)에서 나며(無量義者 從一法生=무량의자 종일법생),
      그 하나의 법은 곧 무상(無相)이라.(其一法者 卽無相也=기일법자 즉무상야). ----
 
----무량의, 일체중생을 한 사람도 빼놓지 않고 구제한다는 가르치심은 하나에서 쏟아져 나온다. 하나진실, *절대의 진리이다. 진실을 설함에 있어서 그 하는 방법은 다르지마는 결국은 한 곳에 귀착한다. 한 곳,  궁극의 귀착점은 부처님께서 얻으신 깨달음이다. 깨달음이 대자대비이며 *<불지견>근본이다. --.
 
   
 
                          제법(諸法)의 실상(實相)     중도(中道)*① 공(空)  불교성경-p162~p172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道)를 닦는 자(者)로서 피하지 않으면 안되는 두 가지 치우친 생활이 있다. 첫째는 물욕(物欲) 때문에 마음을 빼앗기는 생활이요, 둘째부질없이 자기 마음과 몸을 괴롭게 하여 가혹(苛酷)한 고행을 하는 생활이다. 그런데 이 두 가지 치우친 생활을 벗어나서 마음의 눈을 뜨고 *지혜(智慧)를 얻어 깨달음에 들어가면 그것이 중도(中道)의 생활이다. ---전법륜경에서--
그러면 이 중도의 생활이란 무엇인가. 올바른 견해(見解)와ㆍ올바른 생각과ㆍ올바른 말과ㆍ올바른 업(業)과ㆍ올바른 생활과ㆍ올바른 노력과ㆍ올바른 기억과ㆍ올바른 마음의 통일(統一)이니, 이것이 여덟 가지 바른 길이어서 *팔정도(八正道)라고 한다.-----전법륜경에서--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모든 사물(事物)은 인연(因緣)에 의하여 생겼다가 없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유(有)무(無)를 여의고 있다. 어리석은 자는 혹은 (有)다 혹은 (無)라고 보고 있으나, 올바른 지혜를 가지고 보는 자는 *집착하지 않는다. 이것이 중도의 올바른 견해다.
개의 재목이 큰 강물을 흘러간다고 하자. 그 재목이 좌우(左右)의 언덕에도 가까이 가지 않고, 가운데로 흘러 가라앉지도 않고, 육지에도 올려 놓이지 않고, 사람에게 건져지지도 않고, 소용돌이 속에 휘말려 들어가지도 않고, 재목 내부가 썩지도 않고, 줄곧 흘러만 간다면 그 재목은 필경에 바다로 들어갈 것이다.
이러한 비유는 재목과 같이 사람도 에 집착하지 않고, 에 집착하지도 않고, 유무(有無)에 집착하지도 않고, 에 집착하지도 않고, 에 집착하지도 않고, (正)에 집착하지도 않고, (邪)에 집착하지도 않고, 어리석고 망녕됨을 벗어나서 깨달음에 걸리지도 않게 흘러가는 가운데에 몸을 맡겨 놓는 것이 곧 도(道)를 닦는 자의 중도의 견해요 중도의 생활인 것이다. ---능가경에서---
도(道)를 닦는 생활에 있어서 중대한 것은 어디에나 집착(執着)하지 않는 일이다. 모든 사물은 본성(本性)(空)해서 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고, 일정한 성질도 없는 것이므로 잘 알고 집착하지 말 것이며, 자기가 행하는 선행(善行)에도 집착하지 말 것이며, 어떤 것에도 속박되어서는 안된다. ---능가경에서---
 
다시 말하면, 집착하지 않는다는 것은 붙들리지 않고 빠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를 닦는 자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동시에 오래 사는 것도 바라지 않는다. 또는 이런 견해와 저런 견해의 어떠한 견해에도 쫓아가지 아니하는 것이다. ---능가경에서---
사람이란 조금이라도 사소한 어떤 인연이 있으면, 곧 거기에 마음이 끌리고 만다. 그리하여 이 끌리는 한 생각이 움직이면 홀연(忽然)히 어리석고 망녕된 생활을 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한 생각에 붙들리지도 말 것이며, 취하지도 말 것이며, 빠지지 않는 것이 집착되지 않는 생활이다. --능가경에서---
 
--깨달음이란 것도 본성이 없기 때문에 참모습은 깨달을 것도 없는 것이지만, 어리석음이 있기 때문에 깨달음이 있는 것이다. 어리석음이 없으면 깨달음도 없어지고 만다.
그러므로 어리석음을 떠나 깨달음은 없고, 깨달음을 떠나 어리석음은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깨달음은 오히려 장애가 되기도 한다. 마치 어두움이 있으니까 비쳐 줄 밝음도 있고, 어두움이 없으면 비칠 것도 없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비치는 것과 비치어지는 것이 함께 없어져야 한다. --때문에 참으로 를 닦는 자는 깨닫되 깨달음에 머무르지 않는다. 깨달음이 있다는 것은 오히려 어리석은 것이 있는 까닭이다. 왜냐 하면 어리석음과 깨달음에는 상대성이 있는 까닭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리석음과 깨달음이 없는 경지에 이르면, 모든 어둡고 어리석은 망녕된 장애가 그대로 깨달음이요 어두움이 그대로 광명인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번뇌가 그대로 깨달음인 경지(煩惱卽菩提)에 까지 이르도록 깨달아 가지 않으면 안된다.- --능가경에서---
 
모든 경계의 사물(事物) 평등하여 차별이 없는 것을 이라 하고, 생멸을 떠난 것이라 하고,독립된 본성이 없는 것이라 하고,차별적 모습이 없다고 한다. 그것은 사물 자체가 먼저 말한 바와 같이 진실한 바탕이 없으므로 생긴 것도 없고 없어짐도 없는 까닭이다.
이렇게 본성은 없고 오직 인연(因緣)이기 때문에 이라고 하는 것이다. --능가경에서---
이와 같이 그 성품이 본래부터 한 것이기 때문에 이것을 생멸(生滅)이 없다고 이르는 것이요, 또 모든 사물은 서로 인과(因果)의 관계를 가지고 성립된 것이기 때문에, 모든 것은 상대성(相對性)을 가진 무진한 인연으로 된 것이라 하는 것이다. ---마치 빛나는 광명이 있으면 그림자가 있고, 긴 것이 있으면 짧은 것이 있고, 이 있으면 이 있고, 것이 있으면 검은 것이 있는 것과 같이, 그 사물 자체의 성질이 독립해 있을 수가 없기 때문에 본성이 없다고 하는 것이다. --능가경에서---
 
또는 그렇게 때문에 광명 밖에 그림자가 없고, 긴 것 밖에 짧은 것이 없고, 어리석음 밖에 깨달음이 없고, 깨달음 밖에 어리석음이 없으니, 이러한 두 가지는 서로 상반(相反)되는 것이 아니다.
모든 사물들은 다 대립하여 상반(相反)되어 보이면서 서로 상관되는 모습이 없으니. 이것을 가리켜 무차별(無差別)이라 말하는 것이다.----능가경에서---
 
사람은 언제나 사물의 생김과 없어짐을 보아 왔으나, 사물에는 본래부터 생멸상(生滅相)이 없기 때문에 이와 같이 사물의 참된 모습을 보는 눈을 얻어서, 사람의 생사(生死)에 차별(差別)이 없음을 알아 차별 없는 도리(道理)를 깨달아야 한다.---유마경에서---
시람 나(我)가 있는 줄로 생각하기 때문에 나의 물건이라는 (我所有)에 집착한다.
그러나 본래부터 (我)란 없기 때문에 나의 것이라는 아소유도 없는 것이니, 그러므로 (我)아소유(我所有)가 없음을 알아 둘이 아닌(不二) 도리(道理)에 들어가야 한다.---유마경에서---
사람은 깨끗하고 더러운 것이 있다고 생각하는 대립에 걸려 있다. 그러나 물건에는 본래 깨끗함도 없고 더러움도 없는 것이다. 이 깨끗하고(淨) 더러운(穢) 것이 다같이 마음의 분별 망상에서 일어난 것에 불과하기 때문에, (淨) (穢)가 없는 줄로 알아서 아닌(不二) 도리에 들어가야 한다. ---유마경에서---
 
사람 이 본래 별다른 것이 아닌 줄 알둘 아닌(不二) 도리에 들어가야 한다.
사람들은 죄(罪)를 두려워하고 복(福)을 희망한다. 그러나 참된 지혜로써 이 두 가지를 보면 죄의 본성(罪本性)이 본래 하여 가 그대로 이 됨을 알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가 그대로 이 됨을 깨닫고 속박과 *해탈이 별다른 차이가 없음을 알아서 둘 아닌(不二) 도리에 들어가야 한다. ---유마경에서---
사람은 어리석은 것과 깨달음을 전혀 별다른 것으로 보고 있으나. 어리석은 것을 여의고 깨달음이 없고, 얽매임을 여의고 해탈이 없음을 깨달아서, 어리석음깨달음둘 아닌(不二) 도리에 들어가야 한다. --유마경에서---
그러므로 를 말하고, 번뇌보리(菩提)를 말하고, (實)불실(不實)을 말하고, (正)(邪)의 두 가지씩을 말하고 있으나, 실상을 따져 보면, 둘이면서 둘이 아니다. 그 진실한 모양에 있어서는 말 할 수도 없고, 보일 수도 없고, 알 수 없어 모든 (言)과 모든 헤아리는 분별을 여의는 것이 둘이 아닌(不二) 도리가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번뇌를 여의고 깨달음이 있는 것은 아니다. 저 이교도(異敎徒)들의 잘못된 견해는 번뇌깨달음이 따로 있다고 고집하고 있으나, 실상은 모든 번뇌가 그대로 부처님의 마음인 것이다. 비유하면, 청정한 연꽃이 깨끗한 높은 언덕이나 육지에 피지 않고, 도리어 썩고 더러운 진흙 속에서 나는 것과 같다.---유마경에서---
 
산처럼 높은 나(我)라는 생각을 일으키는 자야말로 비로소 를 구하는 마음을 일으키고, 깨달음도 필경 얻게 될 것이다. 바다 속에 들어가지 아니하면 귀중한 보배를 얻지 못하는 것과 같이, 번뇌의 진흙 바다에 들어가지 아니하면 깨달음의 보배도 얻을 수가 없다.
그러므로 옛날신선(神仙)이 된 도산(刀山)에 올라가서 큰 불가운데에 몸을 던졌는데, 아직 불속에 이르기 전에 시원함(淸凉)을 깨달았다는 말과 같이, 번뇌가 그대로 보리(菩提=깨달음)이기 때문에 명성과 이익을 욕심내고 미워하는 큰 불가운데에도 보리(菩提)의 서늘한 바람이 있는 것이다.------화엄경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은 서로 반대되는 두 가지를 여의고, 그 둘이 아닌(不二) 하나를 얻게 하는 것이니, 만일 서로 반대되는 두 가지 중의 어느 하나라도 취하여 집착한다면 설사 그것이 착한 선행이요, 바른 일일 것이라도 틀린 것이 되고 만다. --그렇기 때문에 만일 나(我)가 있다고 집착하면 그것은 틀린 생각이 되어 항상 고통을 여의지 못할 것이요, 그렇다고 만일 나(我)가 없다고 하면 그것도 틀린 생각이다. 그리고 만일 모든 사물이 변천(變遷) 무상(無常)한 것이라고 하면 그것도 틀린 견해에 집착하는 것이요, 다시 모든 사물이 다 변하지 않는 것이라고 하면 이것도 본래 틀린 생각이다. ---능가경에서---
다시 또 모든 세상 일이 괴로운 것이라고 일러도 틀린 생각이요, 또 모든 세상사가 즐거운 것 뿐이라고 이르면 이것도 틀린 생각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어디까지나 중도(中道)로써 이러한 두 가지의 치우침을 고요히 살펴 본 다음 완전히 떠나신 그것이다.---능가경에서---
 
진실하게 고요히 살펴 본다 함은 나(我)인(人)중생수명(壽命)을 관하지 않는 일이니, 그것을 중도(中道) 진실정관(眞實正觀)이라 이름한다. 참되게 살펴 봄이라 함은 물질성(物質性) 상(常)아니요, 또한 무상(無常)도 아니라고 관하고, 느낌ㆍ생각ㆍ의지작용ㆍ식별이 상(常)도 아니요무상(無常)도 아니라고 관(觀)하는 것을 이름한다.
진실관찰(眞實觀察)이라 함은 지종(地種=흙이라는 원소)은 (常)도 아니요, 또한 무상(無常)도 아니라 관하고, 지ㆍ수ㆍ화ㆍ풍ㆍ등 도 (常)도 또한 무상(無常)도 아니라고 관하는 것을 말한다. 왜냐하면 상(常)이라면 이것도 치우침이요, 무상(無常)이라면 이것도 치우침이기 때문에, 상(常)무상(無常), 이 중에는 색(色)도 없고, 모양도 없고, 밝음도 없고, 지(智)도 없다고 관하는 것이 중도 제법진실상관(中道 諸法眞實觀)이다. 그리고 다시 (我)라고 하면 이것도 치우침이요, 무아(無我)라고 하면 이것도 치우침이어서 (我)무아(無我), 이 중에는 색(色)도 없고, 모양도 없고, 이름도 없고, 지혜도 없는 것이라고 관찰하여야 한다. 이것이 중도에서 온갖 사물의 진실한 모양을 관찰함이다.---대보적경에서----
 
다시 라고 하면 이것도 치우침이요, 라고 하면 이것도 치우침이어서, 가운데에는 색도 없고, 모양도 없고 이름도 없고, 지혜도 없는 것으로 관하는 것이 중도 제법실상관이다.---대보적경에서----
또한 만일 마음의 실체가 있다면 이것도 치우침이요, 실체가 없다면 이것도 치우침이어서, 만일 마음의 분별도 없고, 마음의 작용도 없다고 관하면 이것이 중도 제법실상관이다.
이와 같이 착한 일과 한 일, 세속일과 세속을 초월한 일, 있는 일과 없는 일, 번뇌가 있는 것과 번뇌가 없어진 것, 생멸하는 것과 생멸을 초월한 것, 더러움이 있는 것과 더러움이 없는 것에서도 극단을 떠나 가히 받을(受)도 없고, 가히 할 수도 없다고 관하는 것이 중도 제법실상관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 도  이것이 극단이요, 도 이것이 극단이기 때문에 중간에는 색도 없고, 형상도 없고, 이름도 없고, 지혜도 없다고 관하면 이것이 중도 제법실상관이다.---대보적경에서---
 
   
 
                잠깐 !       circle03_darkgreen.gif 그 하나의 법은 곧 무상(無相)이다(其一法者 卽無相也)
 
(相)이란 모양, 차별상입니다. 예컨대 인간의 경우를 생각해 보더라도 성품욕망이 각각 다른 온갖 차별이 있으나 수행 여하에 따라 부처님이 됩니다. 절대의 이치,  *무상(無相)* 용입됩니다. 눈으로 보기에는 백이면 백천이면 천 사람이 각각 다릅니다. 그러나 모두가 다 부처님이 될 성질을 가지고 있으므로, 가르쳐 인도하기에 따라서는 한 사람이건 어리석은 사람이건, 다 부처님이 될 수 있습니다.
만약 가르쳐 인도하지 않으면, 지금 착한 사람이다ㆍ 지혜로운 사람이다ㆍ 라고 일컫는 사람이라도 거기에 멈춰지고 더 나아가지 못하여 끝내 부처님의 경지에 이르지 못합니다. 그 점을 생각할 때, 절대의 이치는 무상(無相), 차별초월한 것입니다.
아무튼 모든 근본은 <큰 하나>라는 이치를 알고, 모든 사람에게 단 하나의 *절대의 진리를 심어 주는 것입니다. 즉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바를, 경전을 통해 조금씩 배워서 그것이 완전히 모든 사람의 것이 되었을 때 부처님과 일치하는 것입니다. 곧 차별을 초월한 무상(無相)입니다.
근본은 하나,  진실이란 두 가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상대편의 정도에 따라 *삼주설법으로 설하여 모든 중생이 차별상을 떠나 *일불승 부처님 문중에 들게 하는 것이 무상(無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