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본문- 019-(1)

비유하건대 좋은 의원이 지혜가 총명하고 통달해서 밝게   circle03_darkgreen.gif 약방문과 약을 다루어서 여러 가지 병을 잘 다스림이니, 그 사람은 자식이 많아서 혹은 열(十) 스물<二十>로부터 백(百)이라. 사연이 있어 멀리 다른 나라에 가니, 모든 아들이 그 후에, 다른    circle03_darkgreen.gif 독약(毒藥)을 마시고 약 기운이 발해서 정신이 어지러워    circle03_darkgreen.gif 땅에 뒹굴음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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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실성 부처님의 수명론 관점에서,  전인류 구제를 전제(前提)한 부처님의 본서원(本誓願),  비전을 이루기 위해서는 부처님만의 설법의식(儀式)교화(敎化)작법(作法)이 있고, 또한 모든 부처님 그와 같으시다는 것을 본문-018-(3)에서 자세히 공부하였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삼주설법(三周說法),법설(法說)ㆍ② 비유설(譬喩說)ㆍ③ 인연설(因緣說)로 일체 중생을 한 사람도 빼놓지 않고 제도하신다는 그 일환으로,  비유설로 말씀하신 <양의(良醫)와 양약(良藥)과 치자(治子)의 비유>를 공부하겠습니다.
 
<양의와 양약과 치자의 비유>법화경(法華經)은  이러한 경전이다ㆍ석가모니 부처님은 이런 분이시다ㆍ하는 부처님의 정체(正體), 부처님이라는 존재를 비유로 재차 말씀하시는 경문입니다.
 
이 비유를 철저히 공부해서 절대 경지의 완벽한 부처님 자리, *부처님 처소(處所)를 깨달으면 法華經우리 인생은 나누어질 수 없는 <큰 하나>, 곧 <큰 생명>이라는 것을 자각하게 됩니다.
부모자식간천륜(天倫)이 나누어지는 것입니까 ? <큰 생명> 당체이신 부처님과 우리 중생도 나누어지지 않습니다. <양약 중의 양약>이라는 法華經과 우리 중생이 나누어지는 것입니까 ? 분리불가(分離不可)입니다.
<양의(良醫)>는, 서양 의학을 전공한 양의(洋醫)이거나,·한방의 의술을 말하는 한의(漢醫)거나 관계없이 좋은 의사,  명의(名醫)를 말합니다. <(良藥)>은, 매우 효험이 있는 좋은 약,  양약(良藥)을 말합니다. <치자(治子)>는, 좋은 의사좋은 약처방으로 고친 아들을 말합니다.
모든 인간은 병(病)으로 해서 죽습니다. 암을 비롯하여 심장병ㆍ위궤양ㆍ에이즈ㆍ -등 각종 질병으로 해서 인간은 죽습니다. 인연따라 알 수 없는 세균이 끊임없이 생겨나고, 거기에 맞서 세균을 죽이는 약품이 끊임없이 개발되고 또 개발되어도 인간은 병마로 해서 끝내는 죽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실달태자의 신분으로 <어째서  인간은  낳고   늙고  병들어  죽는가> 하는 근본문제를 해결하려고 출가하여 대우주의 진리, 생로병사학(生老病死學)으로 완성된 인간  부처님이 되셨습니다. 그리고 체득하신 진리를 42년간 *방편교학으로 알기 쉽게 풀어서 펴시다가, 부처님의 성수 72세에 이르러 완전한 인간, 영원한 생명 成佛의 길을 法華經으로 열어주셨습니다.
法華經의  요체(要諦)가 되는 여래수량품에 오셔서 <백천만억 나유타아승지겁>성불하신 *구원실성 부처님의 수명론으로 대우주라고 하는 총체상(總體相), <큰 하나> *진여를 열어주셨습니다.
 
<백천만억 나유타아승지겁>성불하신 부처님의 수명론안에, 일체의 학설과 세상의 모든 경전, 종교가 용입됩니다. 불교를 초종교다ㆍ초철학이다ㆍ초과학이다ㆍ고 많은 소리로 찬사를 던지는 것이, 바로 부처님의 수명론 안에서 파생되고,  circle03_darkgreen.gif 용입(溶入)되기 때문입니다.
 
부처님께서는,---성불의 길로 가느냐 안가느냐너희들 선택에 달렸다. 내가 대신 갈 수 없다. 나는 다만 그 밝은 길로 가도록 그 길을 열어주는 것 뿐이다. 나는 너희들이 하는 짓을 보면, 불쌍하고 가여워 눈물 멎을 날이 없다. --하시며 50년간 강인하게 법을 펴셨습니다. 드디어 부처님께서는 법화경 여래수량품에서 부처님의 수명론으로, 하시고 싶은 말씀을 다 하시고, 다시 <양의와 양약과 치자의 비유>로 말씀하시는 것이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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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ffeecup_skyblue.gif       circle03_darkgreen.gif 약방문(藥方文)과 약을 다루어서 여러 가지 병을 잘 다스림이니,
 
세간에서 <약방문>이라는 것은 약을 짓기 위하여 약 이름과, 약의 분량을 적은 종이를 말합니다. 오늘날은 약방문이라 하지 않고 처방전(處方箋)이라 합니다. 병원에 가면 의사가 진찰을 한다거나ㆍ사진을 찍는다거나ㆍ갖가지 의료기구로 검사한 다음 환자의 증상에 따라 약을 짓는 방법을 자세히 기록한 처방전을 받습니다.환자는 처방전을 들고 약국에 가서 약을 지어 먹고 병을 고침니다.
 
백년도 못 버티는 피지컬 바디 육신의 건강을 위해서는 병원에서 주는 처방전에 전적으로 의지합니다. 병원이 신통치 않다고 생각하면, 천리도 멀다 않고 좋은 병원, 이름 있는 의사를 찾아가 죽을 병이 들었으니 살려 달라 합니다. 돈은 얼마던지 내겠으니 병을 고쳐달라 애걸합니다.
 
그러나 스피리츄얼 바디의 영향권인 *<무명(無明)>이라는 고질병을 고쳐 달라고 의사를 찾아가는 사람은 없습니다. 육신이 병들면 고치겠다고 열의가 대단하지만, 무명으로 연유한  circle03_darkgreen.gif 탐진치(貪嗔癡) 삼독(三毒)이라는 고질병, 고정관념(固定觀念)은 전연 고치려 하지 않고, 오히려 자기의 위상으로 알고   circle03_darkgreen.gif 집착합니다.
 
독일실존주의 철학자 니체 <무명(無明)>이라는 고질병에서 벗어나려고,---(神)은 죽었다. 인간은 무한한 자기초극(自己超克)을 거듭하여 神을 대신하는 초인이 되지 않으면 안된다. 인간은 태어나면서 사형선고를 받았다. 다만 그 사형집행을 유예(猶豫)하고 있을 뿐이다. 고로 존재하는 것에 기뻐하지 않으면 안된다. -라고 소리쳤습니다.
 
니체이 살아 있다면 어째서 인간에게 질병과 고통을 주는가,·어째서 그 고통으로부터 구제 받지 못하고 죽는가 하고, 문제의식을 일으키고 근원을 탐구했습니다. 니체어려서는 전통적으로 에 기초를 둔 생명에 대한 가치관에 심취했습니다.
그러나 성장한 뒤, 생명에 대한 가치관을 고대 그리스적인 우주 자연계에 눈을 돌렸습니다. 인간의 근본적인 생사문제를 건드려 보았지만, 무명하여 *구원실성  부처님의 수명론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것은 부처님처럼 각자(覺者)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다만 <불완전한 인간>이라는 응용 소프트웨어의 한계에서 머물다 갔습니다.
 
본문에서 <약방문>이라는 것은 부처님께서 50년간 설하신 8만4천 대법문을 말합니다.
일체 중생을 한 사람도 빼놓지 않고 구제를 전제한 완전한 준거(準據) , 오시팔교(五時八敎) 교판(敎判)이라고 생각하면 이해가 빠릅니다.
 
오시팔교란,  ① 화엄시(華嚴時=21일)의 화엄경·   ② 아함시(阿含時=12년)의 아함경·   ③ 방등시(方等時=8년)의 방등경·  ④ 반야시(般若時=22년)의 반야경·  ⑤ 법화열반시(法華涅槃時=8년)의 법화열반경입니다. 장장 12년씩이나 설하신 아함경을 비롯하여 방등경반야경법화경ㆍ모두 중생의 고통과 번뇌를 제거해주고,<완전한 인간>이 되게 하려는 약방문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법화삼부경 무량의경 설법품 제 2에서, ---모든 중생의 성품과 욕망이 같지 아니함을 알았음이라. 성품욕망같지 아니하므로 가지가지로 법을 설함이니라. 가지가지의 법을 설하되 방편력으로써 하였으니,--라는 법문이 나옵니다.
 
부다가야 보리수 아래서 금생에 성불하신 금생 석가모니 부처님으로만 알고 있는 중생에게, <백천만억 나유타겁>에 성불하신 부처님의 수명론을 얘기 해봤자 중생이 알아 듣지 못하니까, 중생의 근기와 욕망에 따라 42년간 권교를 설하셨습니다. 그것이 여기 비유에서 을 잘 고치는 의사의 <약방문>이라는 것입니다.
 
                 circle03_darkgreen.gif 용입(溶入)
 
<물질펀히 흐를용(溶)들입(入)>자의 용입(溶入)<큰 하나큰 생명>이 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법화경을 항상 염불독경(念佛讀經)하고, 우리의 삶 속에서  실천하면, 그대로 (腦)라고 하는 정보체(情報體)에 입력되기 때문에, 스스로 부처님과 하나가 되어 살고 있다는 생활정서가 되겠습니다. 그러나 법화경 공부할 때, 부처님은 참으로 거룩한 분이라고 생각하다가도, 돌아서면 잊어 버린다면, 뇌간(腦幹)이라는 무의식계에 저장되지 않았기에 그것은 용입이 아닙니다. 하루 24시간, 꿈속에서까지도 부처님과 함께라는 생각이 떠나지 않으면, 그것이 <백천만억 나유타겁>에 성불하신 부처님의 수명론용입되는 <큰 하나큰 생명>입니다.
 
이해를 돕고자 낙동강 천삼백리를 예를 들겠습니다.
총연장 521.5㎞로 남한에서 가장 긴 낙동강은, 강원도 태백시 함백산 황지 못에서 발원하여 영남지역을 구비구비 흘러 남해로 유입(流入)하는 과정에서, 반변천ㆍ내성천ㆍ금호강ㆍ황강ㆍ남강ㆍ밀양강 --등이 모두 낙동강으로 흘러들어갑니다. 그러한 낙동강 유역의 모든 강의 유입(流入)을 개념적으로 아시고 계시면, 용입(溶入)에 대한 이해가 빠를 것입니다.
 
법화경을 공부하는 사람은 *구원실성  부처님의 수명론우리의 삶을 용입시켜, <큰 하나> *진여에 들어가는 것을 목적으로 삼겠다고 마음을 일으키고 실행한다면 그것이 法華經 신앙의 용입(溶入)입니다.
 
                        circle03_darkgreen.gif 탐진치(貪嗔癡) 삼독(三毒)
 
(貪)탐욕(貪慾), 욕심을 말합니다. (瞋)진에(瞋恚) 성 잘내는 것을 말합니다.·(癡)우치(愚癡)  곧 어리석음을 말합니다. 이 세 가지는 부처님이 될 자질(資質), *불성(佛性)을 가지고 있는 범부에게 해로운 독과 같다 해서 삼독(三毒)이라 합니다.
 
세계사에서 탐욕의 원조는 바이킹입니다. 8~11세기에 걸쳐 게르만 민족과 노르만인들의 탐욕은, 스칸디나비아 해양을 건너서 오대양 육대주를 누비고 다니며, 미개한 이민족을 침략하여 식민지나 종속국을 만들었습니다. 그것이 바이킹·해적이라는 이름의 탐욕입니다.
 
                  circle03_darkgreen.gif 독약(毒藥)을 마시고
 
세간에서 독성을 가진 약제를 독약이라고 합니다. 극약보다 독성이 한층 강하여 극히 적은 양으로도 사람이나 동물의 건강이나 생명을 해칠 수 있는 것을 독약이라 합니다. 그러한 독약을 많은 자식들이 의사 아버지가 없는 사이에 보약인 줄 착각하고, <독약을 마시고 약 기운이 발해서 정신이 어지러워--> 정신을 잃었다는 것이 무척 의미가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마음이라는 것은 정처없이 일어났다가 사라지고, 사라졌다가 일어나는 것이 무상한 것임을 생각하여, 집착하지 말라. 즐거운 일이나괴로운 일이나다같이 고(苦)의 원인이 되는 것임을 생각하여 집착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집착하는 마음이, 그 집착하는 탐욕이 생명을 해치는 독약입니다.
 
우리의 마음이라는 것은 근원을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교(敎)를 들으면 좋아지고, 교(敎)를 듣지 않으면 독약을 먹은 것과 같이 분별력(分別力)을 잃고 재앙을 몰고 다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영혼을 위해서는 부처님의 가르치심이라는 양약(良藥)이 필요합니다. 육신을 위해서는 감기에 먹는 약ㆍ체한데 먹는 약ㆍ신경통에 먹는 약ㆍ심장병에 먹는 약이 있습니다. 병에 따라 약이 다릅니다. 약이라고 해서 덮어놓고 먹지 않습니다. 특히 독약은 먹지 않습니다. 그처럼 스피리츄얼 바디,  우리의 마음도 독약을 먹지 않기 위해 법화경 양약을 먹어야 합니다.
 
감기 정도는 약국의 간단한 약으로 고칠 수 있지만, 중병에 걸린 사람은 웬만한 약으로는 고칠 수 없으므로, 훌륭한 의사가 세밀하게 검사하고ㆍ진찰 해보고ㆍ거기에 알맞는 약을 조제해 주는 약을 먹고 병을 고치는 것처럼, *오탁악세에는 부처님 법을 가슴에 깔고 있으면, 재앙을 만나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독약을 먹거나 하는 착각은 저지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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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dea.gif         잠깐 !           circle03_darkgreen.gif 땅에 뒹굴음이라.
 
<땅에 뒹굴음이라>는 독약을 먹고 정신이 어지러워 땅에 엎어져 괴로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오탁악세(五濁惡世) 말법의 세상이 되어 사람들의 마음이 몹시 험악해지고, 탐진치 삼독에 빠져 앞뒤 지척을 분간 못하는 것이 마치 독약을 먹고 정신을 잃은 것과 같다는 뜻입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여간한 가르치심으로서는 탐진치 삼독을 해독 시키지 못합니다.
 
이해를 돕고자 역사적인 것을 예를 들겠습니다.
 
1592년. 임진왜란은 조선조 정치인들의 사색당파(四色黨派)간의 투쟁의 인과(因果)입니다.
이율곡(李栗谷)선생은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0 여년 전, 삼정승 육조판서 어전회의에서,--앞으로 10년이 못되어 큰 환란을 당할 것입니다. 일본은 약 100 여년간의 아시카와바쿠후(足利幕府)의 전국시대를 통일한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일본을 평정한 후. 그 여세를 몰아 미구에 우리 나라 조선을 침략할 것입니다. 안보(安保) 차원에서 그 때를 대비하여 우리 조선은 군대를 양성해야 합니다--하고 <십만양병론(十萬養兵論)>을 제안하였습니다.
 
그러나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에 의해 묵살되었습니다. 반대 이유는 태평세월에 민심을 혼란시킨다는 것과, 특히 농가의 장정을 징발하여 군사훈련시키면, 민가의 농사는 누가 지을 것이며, 그 장정들을 먹이고 입히는 군량미와 군복과, 그리고 칼이다ㆍ창이다ㆍ하는 무기 등을 쌓아 놓으려면 방대한 국방예산이 필요한데 그런 것을 어떻게 마련하느냐며 반대하였습니다.
 
병조판서 율곡은 국가의 안보를 맡은 책임자로서 <십만양병론>을 제안했는데, 말이 통하지 않는지라, 벼슬을 헌 신짝처럼 버리고 낙향했다가 4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조정대신들의 머리 속에는 <백성을 등  따시고  배부르게  한다>는 국리민복(國利民福)이 대전제(大前提)된 정치가 아니라, 누가 선조의 뒤를 이어 세자가 될 것이며, 어디에ㆍ어느 당파에 줄을 대야 출세하느냐가 관심사였습니다. 그 시대가 전체적으로 어둡고 혼탁(混濁)했습니다.
 
예측대로 15924월 13일 왜군은 한반도 남쪽 부산포에 총소리와 함께 무방비 상태의 삼천리 강산을 파죽지세(破竹之勢)로 쳐들어 왔습니다. 조정대신과 임금은 의주로 도망가고ㆍ부녀자는 짓밟히고ㆍ가옥과 농토는 폐허가 되고ㆍ장정은 싸우다 죽는 피비린내나는 국가적인 대재앙을 만났습니다.
선조는 싸움질만 하는 조정대신들과, 왕실권속을 이끌고 비굴하게 북쪽으로 피난갔습니다. 선조는 군주로서 평안북도 천연의 요새지라는 의주, <의주 파천(播遷)>이라는 오명(汚名)을 가슴에 안고, 유유히 흐르는 압록강 검푸른 물을 바라보며 가슴을 치며 통곡했습니다.
 
통곡관산월  상심압수풍(痛哭關山月 傷心鴨水風)이요,→
백두산 마루에 높이 뜬 저 달을 우러러 보며 통곡하는데, 압록강 찬바람은 힘없는 군왕의 가슴을 갈기 갈기 찢는구나.
조신금일후  상가갱서동(朝臣今日後 尙可更西東)이라.→
조정 대신들아. 오늘  <의주파천> 이 마당에 이르러서도 <서인동인> 싸움질만 하겠느냐--며 절규했습니다.
관산(關山)이란, 국경이나 요새--등의 중요한 길목을 말하는데 여기서는 한반도 최북단백두산을 말합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중생이 가르치심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서 번뇌(煩惱)에 얽매여, 탐진치(貪瞋癡) 삼독(三毒)에 빠지면 재앙을 받는다는 것을, 역사적인 사례로 말씀드렸습니다.
 
               circle03_darkgreen.gif 집착(執着)
 
집착이라는 것은 어떤 것에 늘 마음이 쏠려서 빠져 나오지 못하고 매달리는 것을 말합니다. 중생의 병은 집착하는데서 생깁니다. 갖고 싶은 것을 못가지면·병이 생깁니다. 버릴 줄을 알아야 합니다. 내 것을 남에게 줄 줄을 알면 집착이 떨어져나갑니다.
 
지장보살(地藏菩薩)을 아십니까. 어느 때. 지장보살의 친구가 찾아와서 몹시 춥다고 하니까, 지장보살은 저고리를 벗어 주었습니다. 조금 있자니까 또 다른 친구가 와서 춥다고 해서 속적삼을 벗어 주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이제는 몸에 걸친 것이라고는 무릎까지 내려오는 짧은 홑고의·잠방이만 걸치고 있는데, 또 다른 친구가 와서 춥다고 하자, 지장보살은 잠깐 기다리라며 땅을 파고 들어가 몸을 완전히 가린 뒤에, 잠방이를 벗어 주면서, 내가 추우니 얼굴만 내놓고 흙으로 덮어달라고 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남을 위해서>는 홑고의까지도 다 벗어 줄 수 있는 그 마음이 소중합니다. 꼭 그렇게 하라는 것이 아니라, 을 떼어내기 위해서는 거기까지 이르러야 한다는 마음을 뜻합니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는 중생을 제도하려면, *<대상과ㆍ장소와ㆍ시기>를 살피라고 하셨습니다.
첫 째   상대가 누구냐는 것을 먼저 알라고 하셨습니다. 법(法)을 듣는 상대가 어떤 사람이냐는 것입니다. 남자냐ㆍ여자냐ㆍ배운 사람이냐ㆍ못배운 사람이냐ㆍ직업이 무엇이냐ㆍ농부냐ㆍ정치인이냐ㆍ--하는 것을 알고 상대의 관심사연결하여 알아 듣는 로 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場所), 입니다. 어떤 장소냐는 것입니다. 넓고 편안한 장소냐ㆍ아니면 강가냐ㆍ산이냐ㆍ하는 장소에 따라 비유를 들어가며 길게 짧게 요점을 정리해서 설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   (時期), (時)입니다. 는 어느 때냐ㆍ전쟁중이냐ㆍ태평 세월이냐ㆍ하는 시대적 환경을 알지 못하고 설하면, 대중의 가슴에 닿지 않아 설득력이 없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대상과장소와시기>--이 세 가지를 살피시고 법화경을 설하셨습니다. 오늘 <양의와양약과치자의 비유>도 그러한 설법의 맥락입니다.